칼럼/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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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한 새해에베소서 1:6절에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한다. 우리에게 왜 이런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 이러한 놀라운 복음의 비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10-16절 말씀을 통해 영원 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계시를 드러나게 하시고 성령께서 그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불안하고 두렵다. 나의 육신적 약함 때문에 더욱 두렵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신다. 동행해 주신다. 나를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 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으며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전혀 다른 나로 변화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또다른 해를 허락해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새해에도 변함없는 사명을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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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절대화 하지 말고 상대화 하라우리가 보통 대화 중에 “절대로 안 돼”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이 말은 “결사반대”(決死反對)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보통 시위 현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결사반대’나, ‘절대로’라는 말들은 자기주장이 너무나 강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이러한 사상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차단된다는 면에서 인간관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좌절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적 가치관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가치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때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하여 그것이 내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절대화하지 말라”라는 권면입니다. 절대화 하지 말고 상대화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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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의 다양한 지체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몸과 그 지체의 기능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설명합니다. 몸의 여러 기능이 생명의 하모니를 이루며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로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할 때 이를 우리는 분쟁이라 합니다. 분쟁은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 되지 않고 각각 따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몸 안에 다양한 기능의 지체가 있듯이 교회도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신앙과 삶을 유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는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은 각 지체로서 다른 지체와 연합하고 생명의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다른 지체를 지나치게 극찬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지체를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각 지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해 사명을 감당할 때 그로 인해 피해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때 각 지체는 함께 울고 웃는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연합하여 한 지체로 연합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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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으로 산 것고전 6: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합니다. 값으로 ‘사다’라는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우리들의 ‘구속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제3자에 의해 값을 지불하여 나를 사줄 때에 내가 자유함을 얻는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언급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주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 역시 불의 병기로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나 ‘영광’ 등의 단어는 하나님께 붙여진 속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스럽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값으로 산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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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터로서 예수 그리스도에베소서 2: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므로 이 모퉁이 돌이 고린도 교회 초석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초석 위에 건물(교회)을 세울 때 주의해야 합니다. 건물의 재료인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등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세우는 공적이 그날에 불로 나타나 밝혀질 것입니다. 건축은 터 위에 집을 짓는 일로써 건축 재료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는 금, 은,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불과 타서 없어질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것으로 대조하는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공적이 불타서 없어지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지만 불 가운데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사역자들이나 직분자들은 교회를 섬길 때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신앙도 모호합니다.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모호하여 분쟁을 유발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분쟁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아니하면 실수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습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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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라고 했다(딤후 2:15). 설교자는 말씀을 ‘옳게’ 선포하는 일을 위해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은 큰 책임을 수반하는데 그 이유는 설교자는 자기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대변인이기 때문이다(Sidney Greidanus).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당위성은 제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설교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오직 삼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설교를 통해 복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에서 “복음 선포는 하나님의 구원 은혜가 전달되는 바로 통로”라면서 “순수한 복음 선포가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복음 선포는 교회가 사는 생명의 양식이다.”라고 했다. 설교의 권위의 근거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 전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관이다. 어떤 성경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경의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개념은 바른 해석을 위한 중요한 요건이다. 모든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설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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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의 신비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 바울의 생애와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이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해 주셨다. 그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선포하였다. 복음의 내용이 오랫동안 ‘감추인’ 비밀이었다. 사도 바울은 신비(비밀)의 계시가 ‘전에는’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계시되었다고 한다. ‘그 신비의 계시’는 ①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②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③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④ ‘모든 민족’을 위하여 알려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유일하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접근할 수 없다. 오직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접근하며, 그 영광을 찬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야 하고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구원도, 사랑도, 기도 응답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는 아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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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8.15 광복 77주년 기념금년은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받은지 77주년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왕 히로히토가 일본방송협회(現 NHK) 라디오로 항복선언을 하여 일본이 세계 2차대전에서 패망하고 조선이 일제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이날 오전 거리 곳곳에 방이 나붙었다.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必聽)” 이윽고 정오가 되자 라디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로 시작하는 히로히토(裕仁, 1901-89) 일왕의 종전 조서였다. 1945년 8월 15일, 불과 4분 10초 동안의 항복 방송으로 36년간 우리를 옥죄어온 식민지 압제의 사슬이 끊겼다. 일본의 패망 소식에 시민들은 너도나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동요작가 윤석중 선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해방의 날 / 서울 장안에 태극기가 물결쳤다. / 옥에 갇혔던 이들이 / 인력거로 츄럭으로 풀려나올 제 / 종로 인경은 목이 메어 울지를 못했다. 해방이 되자 일제가 한국교회를 장악할 목적으로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폐쇄되었다. 그해 10월 11월에 전국적으로 각 교구는 다시 노회를 복구하고 교회를 재건하였다. 1942년 제31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까지 회록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해방의 해인 1945년까지 역사적인 사료들이 인멸되었다. 이 기간 총회, 노회 역사 기록은 보존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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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은사루터는 로마교회의 사제제도적 관점을 가지고 교회를 이해했다. 반면 개혁주의 관점은 교회를 구원의 연합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교황, 추기경, 대주교, 신부 등의 계급적 서열(사제)제도에서 구성된 조직의 틀을 ‘교회’라고 본다. 개혁교회는 교회를 구원받은 각 성도(개인)의 모임을 ‘교회’라고 본다. 일체 건물을 교회라고 보지 않는다. 어떠한 조직체도 교회로 보지 않는다. 오로지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라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는 성스러운 자리가 펼쳐진다. 칼빈의 말에 따르면, 은밀한 곳에 누울때에도 교회는 거기에 있다고 한다.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 서는 살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이 거룩하고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성속(聖俗)과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고, 바로 그 교회에 동참한다. 그리스도인의 은사는 구원받은 자가 교회로써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과 선물이다. 은사는 구원받은 자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은사는 교회로써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은혜로우신 선물이다. 이 은사는 교회로써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은혜로우신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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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설교는 연설이 아니다종교적 생활에 관하여, [미국의 도덕적 낙관적 이원론적 문화, 경험이 이끄는 문화]가 엄청난 피상성을 초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죄와 은혜의 대조는 심이 약화되었습니다. 거듭남과 성령님의 사역은 그저 주변부로 밀려났습니다. 설교는 대부분 도덕만 다룰 뿐입니다. 선택과 칭의와 같은 전체 신앙적 요소는 부족하거나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펼치는 사역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설교는 연설이 되었고 성경 본문은 그저 낚식바늘과 같을 뿐입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신앙생활은 우리 자신의 것과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들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종교를 지배합니다. 마치 그들이 예술과 학문을 통달하듯이 말입니다. 이제 종교는 오락과 즐거움의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위의 글은 아래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헤르만 바빙크 지음, 『헤르만 바빙크의 설교론(설교는 어떻게 사람을 변화 시키는가?』 제임스 에글런턴 역음, 신호섭 옮김 (서울: 다함,1921), 19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