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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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교회의 몸 지체 신비 비유고전 12:15절에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라고 한다. 이어서 16절에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유기체(有機體)라는 단어는 서로 밀접하게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는 개체 혹은 부분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생명체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각 부분끼리 상호 간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전체적으로 하나의 생명의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바울 사도는 몸의 지체들이 가진 중요 기능을 설명하면서 ‘손과 발’, ‘눈과 귀’를 대비시키고 있다. 몸에서 비중이 있는 ‘손과 눈’에 비해 그보다 덜한 ‘발과 귀’가 불평하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발과 손’ 그리고 ‘귀와 눈’ 등은 각각 다른 은사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 교회 지체들(구성원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우월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열등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비유를 통해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불평한다. 이런 생각들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 본인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는다. 늘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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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교기독교를 그리스도교라 한다. 세계 인구 가운데 약 17억 명의 신자가 있으며, 로마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 등 3대 종파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가 믿는 히브리어 성경을 구약의 정경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이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임한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성육신 하신 하나님,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 복음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당시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구속주로 믿지 않았다. 대신 히브리어 성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면서 모세율법을 준수해야 구원이 임한다고 믿었다. 즉 유일한 구원의 조건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주장을 반박하며 하나님의 구원이 율법 준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를 믿을 때 주어진 것으로 설명했다. 이 설명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하면 그 율법이 무엇인지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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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은사와 사랑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즉 그 긍지가 대단했으며 지나칠 정도였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고 분쟁이 발생했다. 자신이 가진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긍지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긍지가 잘못된 판단에 의한 것이라면 문제가 된다. 그 긍지는 오히려 하나 된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예배 때에 경쟁적으로 과시하고 자랑했다.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와 다른 사람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비교하여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했다. 그래서 예배가 무질서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한다. 그 성령의 은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12:1~3절에서 성령의 진정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기초를 언급한다. 이러한 기초에 의해 12:4-11절에서는 한 분이신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그리고 12:12-23절에서는 한 몸의 다양한 지체들에 관해 설명한다. 이어 13장에서는 성령의 가장 고귀한 은사로 ‘사랑’을 언급한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데 있음을 말씀한다. 내가 받은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것인가 파괴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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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사도권 근거“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히 밝힌다.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그 하나님이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로 불러주셨음을 말씀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사도직은 신약교회에 아주 독특한 직책이었다. ‘사도’라는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여 높임 받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고린도후서 4장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관해 오해를 받거나 의심을 받았다. 사도직의 징표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사람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진정한 사도임을 일관되게 내세운다. 자신의 사도권이 부정되면 자신이 증거한 복음이 부정되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한다. 자신의 사도권의 근거를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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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믿음의 관계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자들은 성경을 신학과 행위 규범의 제일의 원리라고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으므로 믿음과 성경은 상호 전제적, 상호 인과적 관계 안에 있다. 성경을 믿음으로 읽고 믿음으로 신학과 신앙을 한다.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은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이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불신자이다. 이들은 성경의 부분이든 전체든지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증명을 통해서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그 자신이 불신 가운데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비평적인 접근을 삼가야야 한다. 성경 저자들이 틀렸다는 주장이나 성경 역시도 문화나 환경의 영향을 받는 상대적인 문서일 뿐이라는 해석의 유형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모든 삶의 원천이요 근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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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칼빈의 개혁교회는 교회를 구원받은 각 성도(개인)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 일체 건물을 교회라고 보지 않는다. 어떠한 조직체도 교회로 보지 않는다. 오로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코람데요(Coram Deo)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들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자신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건물에 들어가든지 나오든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 앞에 대면하는 성스러운 자리가 펼쳐진다. 칼빈의 말에 따르면, 은밀한 곳에 누울 때도 교회는 거기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라는 하나님의 존전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고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하는 일이 거룩하고 그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속(聖俗)과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앙인들은 자기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드린다. 이러한 신앙적 삶의 태도는 성령의 올바른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부터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는 것이고, 바로 그 교회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로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오늘의 현실에 충실한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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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핵심교리에 기초한 자기성찰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섬기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는 성령께서 역사한 결과이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진리는 결국 기도 역시 성령의 역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피에서 인성을 취하신 후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케 하셨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가 우리 신앙기초가 된다. 이러한 신앙기초는 삼위 하나님, 성육신하신 하나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등 3대 핵심 교리이다. 이러한 복음의 핵심 교리를 기반으로 한 우리의 신앙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 진리의 혼돈은 신앙의 혼돈으로 이어지고, 삶의 근거를 잃어버린 결과 그리스도인 삶의 정체성이 무너지게 한다. 자기 정체성에 혼란은 자기주장의 절대화, 모든 범사를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자기중심의 극단화, 자기주장의 절대화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인격 결핍의 결과이다. 이런 경우, 언어와 행동의 과격성은 관계의 단절로 나타난다. 복음의 기초 위에서 다시 한번 자기 성찰을 통해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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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성과 은혜성신앙의 의존성과 은혜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곤란해진다. 내 결심도 중요하다.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한 그 때의 결심과 다짐은 귀다. 그러나 그 결심과 의지를 주신 이가 나를 선택하신 주님의 은총의 역사이다. 네덜란드(Dutch) 신학자였던 알미니안(Arminian)은 “신앙은 나의 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내가 믿었고, 내가 선택했고 내가 결심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러나 내 결심의 심오한 바닥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집에 자원해서 들어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교회는 자발적으로 믿고 스스로 결심하고 하나님을 찾아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으면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성도가 되는 것은 나의 힘이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의 자질이나 선행으로 되는 것만도 아니다. 성도가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할 뿐이다. 실존주의는 결단의 용기를 가질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인간의 결단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공허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어떤 능동적인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무궁한 은혜로 인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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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8회 총회 개최지난 주(9.18-21일)에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8회 총회(합동)를 개최했다.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에 최초로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장로교회는 교리와 운영의 원리로 하여 세워졌다. 특히 장로교회의 직제인 목사, 장로, 집사를 통해 교회 본질과 설립목적을 추구해 왔다. 삼직을 항존직이라 한다. 항존직이란 항존직원이란 의미이며 이를 ‘교회직원’이라 한다. 교회 직원에 의해 교회 운영체계가 확립된다. 한국장로교회는 이러한 항존직원 외에 임시직원, 즉 한국교회의 필요에 의해 권사, 서리집사, 전도사, 전도인 등의 임시직원제도를 두고 있다. 장로교회의 상회로 노회가 있고, 노회 상회로 총회가 있다. 이를 삼심제 치리회라고 한다. 개별교회는 당회라는 치리회와 노회,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 교회, 노회, 총회가 있으며, 이러한 치리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에 구속된다. 교회와 노회, 총회는 독립된 치리회인 단체로서 상호 연동되어 존재한다. 교회는 노회에, 노회는 총회에 소속된다. 그 총회가 바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이다. 총회는 1년에 1회로 모이며, 임시총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입법, 사법, 행정의 최종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 총회는 전국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와 장로 동수로 조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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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지배와 변화오순절 성령강림때에 성령이 임하셨다. 하지만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례을 받을 때 성령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한 출발이다. 성령이 어떻게 임하는가? 그들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충만하게 임했다. 그래서 성령이 이끄시는 데로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사역했다. 성령에 의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삶의 광범위한 외형적인 변화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래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변화를 보고 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거듭난 사람은 오랫동안 거듭남의 증거를 숨기지 못하고 나타난다. 중생했으면 거듭남의 합당한 열매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외면적 행위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서 6:17절에서 “사람이 태어날 때 모두 죄의 종”이라고 했다. 중생은 마음과 지성을 새롭게 하고 의지를 교정하고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마음이 각종 더러운 것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던 그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깨끗해지는 것이다. 일체의 더럽거나 추하거나 악한 것을 사모하거나 바라보지 않는다. 악한 것을 느끼는 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만 가질수 있는 경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