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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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봐야 한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미워하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율법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한번 악하다고, 혹은 선하다고 말씀하시면 영원히 악하고 영원히 선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율법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하나님 성품의 묘사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드러냈는데 그것이 율법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 하였다면 그것은 살인은 영원히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율법은 이렇게 선한 것인데 “율법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는 하는데 이 말은 “율법이 곧 하나님과 원수다”라는 말이 아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 율법은 선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율법이 악해서가 아니라 이 율법을 사용하는 사람(유대인)의 방법과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래 목적대로 율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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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식의 근거인 성경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연히 성경에서 왔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이다. 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앙에 대한 바른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적 권위가 있을 때 그 성경에서 기록된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으로 권위가 있다. 우리가 믿는 신지식의 근거와 권위는 신적 권위를 가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2년 기독교회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더불어 신지식의 권위, 즉 그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기독교회의 존폐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이 문제가 무너지면 기독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신앙의 근본 권위에 대한 문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점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갖는 신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신지식에 대한 권위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구주이며,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를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진리는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갖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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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한 새해에베소서 1:6절에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한다. 우리에게 왜 이런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다. 이러한 놀라운 복음의 비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10-16절 말씀을 통해 영원 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계시를 드러나게 하시고 성령께서 그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셨다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우리는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불안하고 두렵다. 나의 육신적 약함 때문에 더욱 두렵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신다. 동행해 주신다. 나를 격려해 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 주신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으며 깨닫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전혀 다른 나로 변화되게 한다. 하나님께서 또다른 해를 허락해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새해에도 변함없는 사명을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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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절대화 하지 말고 상대화 하라우리가 보통 대화 중에 “절대로 안 돼”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이 말은 “결사반대”(決死反對)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보통 시위 현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반대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결사반대’나, ‘절대로’라는 말들은 자기주장이 너무나 강하여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이러한 사상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기회가 차단된다는 면에서 인간관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 앞에서 고민하고 좌절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세상의 가치관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적 가치관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가치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때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있으면 좋지만 없다고 하여 그것이 내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절대화하지 말라”라는 권면입니다. 절대화 하지 말고 상대화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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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의 다양한 지체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몸과 그 지체의 기능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설명합니다. 몸의 여러 기능이 생명의 하모니를 이루며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로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할 때 이를 우리는 분쟁이라 합니다. 분쟁은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 되지 않고 각각 따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몸 안에 다양한 기능의 지체가 있듯이 교회도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지체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생명이 유지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신앙과 삶을 유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붙어있는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은 각 지체로서 다른 지체와 연합하고 생명의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다른 지체를 지나치게 극찬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다른 지체를 멸시해서도 안 됩니다. 각 지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통해 사명을 감당할 때 그로 인해 피해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때 각 지체는 함께 울고 웃는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연합하여 한 지체로 연합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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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으로 산 것고전 6: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고 합니다. 값으로 ‘사다’라는 아고라조(ἀγοράζω)는 우리들의 ‘구속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제3자에 의해 값을 지불하여 나를 사줄 때에 내가 자유함을 얻는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언급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주관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 역시 불의 병기로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나 ‘영광’ 등의 단어는 하나님께 붙여진 속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스럽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값으로 산 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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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터로서 예수 그리스도에베소서 2:20절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므로 이 모퉁이 돌이 고린도 교회 초석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초석 위에 건물(교회)을 세울 때 주의해야 합니다. 건물의 재료인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등이 있습니다. 각 사람의 세우는 공적이 그날에 불로 나타나 밝혀질 것입니다. 건축은 터 위에 집을 짓는 일로써 건축 재료에 따라 달라집니다. 불에 타도 없어지지 않는 금, 은,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불과 타서 없어질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것으로 대조하는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공적이 불타서 없어지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지만 불 가운데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사역자들이나 직분자들은 교회를 섬길 때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모호하면 신앙도 모호합니다. 직분을 감당하는 것도 모호하여 분쟁을 유발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분쟁이 따라다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아니하면 실수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습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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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라고 했다(딤후 2:15). 설교자는 말씀을 ‘옳게’ 선포하는 일을 위해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은 큰 책임을 수반하는데 그 이유는 설교자는 자기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대변인이기 때문이다(Sidney Greidanus).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당위성은 제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설교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오직 삼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설교를 통해 복음이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는 그의 교의신학에서 “복음 선포는 하나님의 구원 은혜가 전달되는 바로 통로”라면서 “순수한 복음 선포가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복음 선포는 교회가 사는 생명의 양식이다.”라고 했다. 설교의 권위의 근거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여 전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이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관이다. 어떤 성경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경의 의미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개념은 바른 해석을 위한 중요한 요건이다. 모든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설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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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시발점은 1884년이 아닌 1879년한국 기독교회가 선교사의 입국한 날(1884. 9.20)을 선교 시발점이 아닌 한국인 최초로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파송 받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1879년 최초로 백홍준,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등이 세례를 받아 성경 번역과 서북지역에서 전도했던 그해를 한국교회 선교 출발로 삼아야 한다. 한국에 주재한 장로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초기 역사를 자신들의 선교역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사를 기록하여 왔다. 특히 한국교회 선교 출발을 언제로 하여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국에 주재한 장로회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소속 알렌의 입국인 1884. 9. 20.을 기준으로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 기준에 의해 한국 교회 선교 50년 희년 대회를 1934년에 가졌다. 이 모든 것은 북장로회선교부 중심적 역사 평가와 기록이었다. 알렌 선교사가 입국하여 한국의 기독교회가 출발한 1884년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 사역의 시작을 한국교회 선교 출발로 삼아 교회 역사를 집대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1884. 9. 20. 안수받지 않는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과 1885. 4. 5. 오후 3시에 입국한 안수받은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을 최초의 선교, 목사 선교사 최초의 입국 등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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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복음의 신비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 바울의 생애와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이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해 주셨다. 그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선포하였다. 복음의 내용이 오랫동안 ‘감추인’ 비밀이었다. 사도 바울은 신비(비밀)의 계시가 ‘전에는’ 감추어졌으나 ‘이제는’ 계시되었다고 한다. ‘그 신비의 계시’는 ①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②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③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④ ‘모든 민족’을 위하여 알려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유일하시며,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들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접근할 수 없다. 오직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접근하며, 그 영광을 찬양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나야 하고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떠한 구원도, 사랑도, 기도 응답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는 아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