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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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지 못한 성령 모독죄“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막 3:29-30) 여기 “성령을 모독하는 자”란 개역판 성경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로 번역했다. 성령을 ‘모독(또는 훼방)하다’는 단어는 ‘중상하다, 비방하다, 모독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는 것이 성령의 모독죄로 말씀한다. 이러한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서기관들(율법학자)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인데 이는 곧 사탄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모독죄이며, 이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 죄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귀신을 쫓는 것을 마귀를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곧 성령을 마귀하고 한 것과 같다. 거룩한 영을 더러운 영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면 죄 용서가 안 되는 것은 어떤 성격의 죄인가? 예수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고 한다(눅 4:18).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이 말씀이 자신으로 인하여 성취되었다고 말씀한다.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축귀사역은 구원 사역이었다. 이러한 구원 사역을 마귀의 사역이라고 말하자 이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성령 모독죄라고 말씀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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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로 부르심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에베소의 교인들을 성도라고 했다. 성도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하기우스((a`gi,ouj))”라는 말로 표현되었는데, 문자적으로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 또는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즉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바울이 성도라고 부르는 이들이 진정으로 그 인격이나 생활이 거룩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에 성도라고 불렀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의 성도들의 인격이나 생활이 완전하지 못했고, 때로는 이방인보다도 못하다는 질책을 받기도 했다. 에베소서 4장 4~8절에서 바울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자질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하나님의 행위를 네 가지의 단어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긍휼”(4절 상), “하나님의 사랑”(4절 하), “하나님의 은혜(5절과 8절), ”하나님의 자비(7절) 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들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셨다는 이것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선택한 유일한 이유이며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서 유명한 조직신학자 핫지(C.Hodge)는 예정의 가장 큰 신비와 감격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가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우리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항상 감사의 제목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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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갈라디아서를 쓸 당시부터 유대교와 기독교가 엄격하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살아서 사역할 때와 초기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 오셨고 그 제자들 12명 전부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초기에 예수님을 따르던 120명의 성도들이 대부분 다 유대인들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엄격한 분리가 되지 않았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른 종교이다. 서로 구분되지 않다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그 무렵에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다르다’는 사실은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 사이에 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온 발전된 종교라고 생각하여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종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들인데다가 성경을 사용하는 구약성경도 동일하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적극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를 다른 종교, 내지 이단이라고 봤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들어와서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됨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이를 거부한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길 밖에 없음을 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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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하시는 일바울은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것이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하나님 영의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영적 황홀경에 빠지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역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과거에 믿기 이전, 우상숭배 시절에 했던 영적 체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황홀경으로는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 오직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난다. 이런 고백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표징이다.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하나님 약속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유일한 길임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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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나타남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행 1:3). 그리고 부활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고, 성령께서는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며”(요 14: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며”(요 14: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선언하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기록으로 완성하게 하였다. 성령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 혹은 복음의 말씀과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이 주된 임무이다. 우리는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전 2: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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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라고 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이 믿음의 원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으면 그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이 믿음의 원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그 믿음의 원리 안에서 충만한 믿음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기초적인 원리 하나를 말할 필요가 있다. ‘대 전제’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믿음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히브리서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믿음이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데 그 믿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불행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여 타락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 접근이 차단되었는가? 그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과 의로우심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선물’ 혹은 ‘은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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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78주년 기념1945년 8월 15일 벽보가 붙었다. “오늘 정오에 중대 방송” 일본이 아세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이 항복이며 우리나라는 광복인 셈이다. 이 방송을 들은 한국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상상만 해도 이 일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의 소식이 있었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경성 거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이유는 방송 내용은 조선반도를 뒤집어 놓을 수 있었지만, 조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방송 내용은 이렇게 시작했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15일 낮 12시에 했던 일왕의 방송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의 방송 내용인지를 잘 몰랐다. 그 당시를 살았던 조선 사람들은 이 방송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이 찾아왔건만, 해방이 온 줄도 몰랐다. 8월 15일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고 잘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광복이 갑자기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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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의 다양한 지체고전 12:12절에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기 지체라는 단어는 ‘멜로스’(μέλος)라는 단어로서 ‘지체’, ‘부분’을 의미한다. ‘몸의 일부’로 설명한다. 또한 ‘음악 구성원’, ‘악기’, ‘노래’, ‘악보’, ‘선율’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여러 사람, 여러 악기를 통해 하나의 하모니를 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다. 그러나 그 몸의 지체가 많아도 그것이 다 한 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설명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몸인 교회의 지체로 설명한다. 모든 지체와 몸과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2: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세례란 이러한 사실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나도 그 안에서 죽었다. 물에 담겨 죽었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 주님의 몸된 지체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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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나타남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행 1:3). 그리고 부활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가시고, 성령께서는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며”(요 14: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며”(요 14: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선언하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기록으로 완성하게 하였다. 성령의 사역과 예수 그리스도 혹은 복음의 말씀과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성령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이 주된 임무이다. 우리는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다(고전 2: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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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위안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시는 그 영원한 어느 때부터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실로 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것이었다. 이 사실이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에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에도 당신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나의 가장 큰 위안은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몸과 영혼 그리고 이 세상과 죽음에서도 내가 신실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죽을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것이라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고 있는가? 우리의 인생의 여정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장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미지의 세계를 지도도 없이 탐험하는 사람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리고 죽을 때에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