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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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합동 측과 통합 측의 신학적 차이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1959)는 합동 측과 통합 측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에 대해 통합 측은 줄기차게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 사기 당한 사건을 덮기 위한 교권 투쟁이 결국 분열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합동 측은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신학적인 W.C.C문제가 제기되어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영재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교회사』에서 제44회 총회 분열은 교권의 갈등이 아닌 신학적인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김영재, 『한국교회사』(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290). 그는 “그러나 W.C.C.에 대한 견해 차이는 우연히 초래한 사소한 것이 아니았다”라고 말하면서 이는 “사소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신학적인 태도와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라고 분명히 했다. 김 박사는 “그리고 그 차이는 세월이 감에 따라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진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발전하였다”라고 평가했다. 분열된 “합동 측의 총신대학은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을 보수”하는 반면, “통합 측의 장로회신학대학은 보수와 진보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신들의 신학은 양쪽 신학의 장점을 계승하는 포괄적인 신학이라고 규정한다”라고 했다. 박용규 교수는 “1959년 교단의 분열 이후 뚜렷이 다른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통합 측은 W.C.C.운동을 축으로 세계교회와의 교류를 추진하였고, 합동 측은 신학적인 보수성을 표방하면서 전도와 선교에 주력하였다”라고 했다(박용규, 『한국기족교회사Ⅱ』,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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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맥스웰과 바실 홀의 한국 접촉과 성경전달영국의 배질 홀(Basil Hall)은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하여(1802), 초급장교 시절에는 주로 북미주에 근무했다. 1812년부터는 프리기트함 볼테이지(Voltare) 호의 장교로 동인도회사에 근무했다. 이때 그는 스루프형의 범선 리라(Lyra)를 타고 중국 광동성을 찾게 되는데 그 귀국 길에 알세스트호(Alceste)의 선장 맥스웰(Muray Maxwell) 대령과 함께 서해를 탐사하였다. 홀은 「조선서해탐사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반도 서해안을 탐사한 것은 1816(순조 16년) 9월 1일부터 10일까지였다. 그의 일행은 잠시 육지에 상륙하여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과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수화(手話)로써 의견을 나누면서 성경을 전달했다. 1816년 9월 1일에 황해도 백령도(白翎島), 대청도(大靑島), 소청도(小靑島) 등에 상륙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했다. 그들이 비인만(庇仁灣) 마량진(馬梁鎭)에 도착했을 때,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초청해 알세스트 호에 안내했고, 다시 조대복과 비인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承烈)을 리라 호에 안내해 구경시켰다. 그들은 조선에 오기 전에 중국에 들렀는 데, 그때 중국에 있던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부탁 대로 조선사람에게 중국어 성경을 전했는데, 첨사 조대복은 이 성경을 정중히 받아 조정에 전달했다. 즉, 1816년 9월 4일에 개신교 성경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달된 셈이다. 순조 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한 권은 첨사에게 한 권은 현감에게 주어 책을 펴본즉 알 수가 없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순조실록 16년(1816) 7월 병인조(丙寅條)에 의하면, 이때 홀 일행을 만나 사람은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事) 조대복(趙大福)과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로 되어 있다. 당일자 실록에 실린 충청 수사(忠淸水使) 재홍(李載弘)의 장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했습니다.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37994;口: 구리로 만든 거푸집]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 내용에, 영길리국(英吉利國)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 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중략> 출처 : 『조선왕조실록』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조.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이 성경이 최초로 한국에 전래된 지점이라는 것은 최근에서야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었는데, 2002년 당시 공주고등학교 교사였던 유승광씨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고 이 책이 성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서천군의 발 빠른 노력으로 이러한 사실이 충남도청과 문화체육관광부에 공식 브리핑되었고, 마침내 ‘서천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사업위원회’가 조직되어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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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선교의 특징과 접촉점, 오늘날의 접촉점은?한국에 초기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이는 다른 피선교지에서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특징이다. 첫째,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의 도움이 아니라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 파송한 선교사들의 전도로 기독교회의 복음이 전해졌다. 복음을 전해 들은 일반 신자들이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 적극적으로 전도와 교회를 세웠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신자들이 생겼으며, 그들은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일부 지식층은 기독교가 한국의 개화를 앞당기며, 사회의 구조적인 악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둘째, 선교사보다 먼저 성경이 들어왔다.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이 들어왔다. 한국의 가톨릭교회 역시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교회를 소개하는 각종 책이 들어왔다. 한국의 기독교회가 들어온 과정을 보면 선교사의 입국보다 성경이 먼저 입국했다. 보편적으로 선교사가 피선지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에 피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한다. 그러나 한국선교는 달랐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피선교지인 한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 한글로 된 번역 성경을 들고 입국했다. 아주 독특한 선교 현상이다. 셋째, 기독교회의 선교 방법이다. 물론 선교사가 입국할 때는 자유로운 선교가 금지되었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직전에 미국과 프랑스와의 통상조약은 자유로운 선교의 기반을 위한 전초전이 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선교에 앞서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매진했다. 공식적으로 선교사 신분으로 입국하지 못한 상황에서 알렌은 의사로, 언더우드는 교사로 입국하기도 했다. 선교는 자유롭지 못했지만, 교육과 의료사업은 자유로웠다. 이러한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기독교의 편견을 없애고 대중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교 방법은 많은 한국민이 전도의 좋은 접촉점이 되었다. 넷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였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고 그 복음으로 인해 커다란 부흥이 있게 된 시대적 상황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섭리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용하신 것처럼, 장차 한국을 위해 복음의 전진기지로 사용하시기 위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러한 섭리를 위해 이 땅에 경제적 부흥을 허락해 주셨다. 지금도 우리들이 해야 할 전도와 선교의 사명에 전력해야 한다. 어떠한 접촉점으로 복음을 전할 것인지를 연구해야 한다. 그 접촉점 중에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언급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접촉점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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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입국은 부활절 아침이 아닌 오후한국 가톨릭교회는 기독교회(개신교)보다 100년 앞선다. 최초의 선교사는 1884. 9. 20.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명 안연(安連), 1858~1932) 선교사를 비롯하여 다음 해인 1885년 4월 5일에 미국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가 입국했다. 알렌은 평신도 의료 선교사였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사 신분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선교사 입국은 알렌 중심이 된다. 그러나 최초의 목사 선교사 입국은 언더우드 선교사 중심이다. 최초의 목사 선교사는 1885.4.5.에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이다. 1885.4.5.은 부활절이었다. 제물포항에 도착한 두 선교사 중 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아펜젤러 선교사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지 못하고 호텔에서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1884.12.4.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개화파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공사관의 대리 공사인 폴크(George C. Foulk 福久 1856~1893)는 당시 임신 중인 아펜젤러 선교사의 부인의 입국이 위험하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한국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해 6월에 다시 제물포에 도착하여 7월 29일에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제물포 호텔에 머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선교편지로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에 보냈다. 미국 북감리회 <해외 선교 보고서>(Annual Report)에 전문이 실리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 편지 말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신 구세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적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1884. 4. 5.이 부활절임을 알려준다. 두 선교사가 제물포에 닻을 내린 것이 오후 3시였으므로 육지에 오른 것은 3시-4시로 추정할 수 있다. 두 선교사가 부활절 아침에 입국한 것이 아니라 오후에 입국하였으므로 “부활절 아침에 입국하였다”라는 말은 맞지 않다. 한국의 최초의 선교는 1884. 8. 8. 20.에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알렌이 한국 선교사로 발령을 받고 입국한 날이 최초의 선교사 입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 선교사의 최초 입국은 알렌이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1885. 4. 5. 일이다.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함께 입국하였지만 제물포 호텔에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1885. 4. 5. 입국한 최초의 선교 목사는 언더우드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이었으므로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그해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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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입국한 초기 장로교 4개 해외 선교부미북장로교(PCUSA) 미북장로교 선교부에서 가장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는 의료선교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다. 그와 그의 부인은 1884년 9월 20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원두우(Horace G. Underwood)가 1885년 4월 5일에 그리고 의료선교사인 헤론(J. W. Heron)과 그의 부인이 1885년 6월 21일에 각각 내한하였다. 알렌은 서울에 첫 번째 병원인 광혜원을 세워 의료선교사로서 그 사역을 감당했다. 그리고 원두우는 1886년에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회심자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성만찬을 행하였다. 그 후 1883년 3월 호톤(Lllias Horton/ 후에 원두우의 부인이 됨)이, 1888년 12월에 기일(J. S. Gale)이 그리고 1890년 1월 25일 마포삼열(S. A. Moffett)이 각각 입국하였다. 따라서 1890년까지 안수 받은 목사는 3명으로서 원두우, 기일 그리고 마포삼열 만이 한국에 입국한 내한하였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의료 선교사인 헤론(J. W. Heron)과 같이 소천한 사람들도 있었고, 도중에 본국으로 돌아간 자들도 있었고, 혹은 선교사 부인 등도 포함된다. 호주장로교회(PCV) 두 번째로 한국선교에 착수한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장로교회(PCV)로서 호주의 첫 선교사는 1889년에 입국한 데이비스(J. H. Davies)이다. 데이비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영국교회 선교회 소속의 울프(Archdeacon J. R. Wolfe)였다. 그는 동 선교회로부터 파송 받아 중국,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는 건강상 그리고 청불전쟁으로 불안한 정국에서 1885년 일본을 거쳐 한국에 잠시 오게 되었다. 이어 한국에 입국한 알렌을 만나 한국의 선교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부산에 머무르면서 한국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멜보른 코필드에 위치한 성메리교회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에게 보냄으로 교회에서 발행하는 국내외선교지에 발표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본 데이비스는 울프의 영향으로 내한하게 되었다. 울프는 이미 인도에서 선교의 경험이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는 성공회에서 장로교회로 이적한 때였다. 그는 선교잡지를 통해 한국에 대해 듣게 되었고, 1888년 11월 22일 일본 선교사인 딕슨과 맥크라덴과 함께 선교사로 인준을 받았다. 1889년에 내한하였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지역까지 300마일의 장거리 여행으로 인한 과로와 천연두에 감염돼 폐렴이 되어 1890년 4월 5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죽음으로 1891년 2대 선교사인 맥카이(J. H. MacKay)목사 부부와 미혼 선교사인 멘지스(Bell Menzies)와 페리(Jean Perry), 그리고 파우셋(Fawcett)이 파송 받아 왔다. 미 남장로교(PCUS) 미 남장로교(PCUS) 선교부가 세 번째로 한국에 설치되었다. 이미 한국에 선교사로 내한한 원두우가 1891년 10월 내쉬빌(Nashville)에서 열린 미국신학교선교연맹에 윤치호와 함께 참여하여 한국에 관한 강의를 하였다. 이때 그 대회에 참여했던 3명의 유니온(Union)신학교 신학생들이 감동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바로 전위렴(W. M. Junkin)부부, 이눌서(W. O. Reynolds)부부 그리고 두 명의 독신여성인 데비스(Linnie Fulkerson Davis), 테이트(Martha Samuel Tate)였다. 한명의 남성 싱글인 테이트(Lewis Boyd Tate)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7명의 선구자는 잠시 서울에 머물면서 한국말과 풍습을 익혔다. 그리고 네비우스 지방분할 정책에 따라 미남장로교는 전라도를 책임졌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으로 인해 1895년까지 선교거점을 세울 수 없었다. 1895년 테이트와 그의 자매 마티가 전주지역으로 이동해 갔다. 그 다음에 1896년 군산, 1898년에는 목표에 세워졌다. 1904년에는 광주에 그리고 1913년에는 순천에 각각 선교거점을 마련함으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었다. 캐나다장로교(PCC) 마지막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부는 캐나다장로교(PCC) 선교부였다. 캐나다선교부가 한국에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하게 동기를 제공한 인물은 메켄지(William J. McKenzie)였다. 그는 핼리팩스 장로교 대학의 학생선교협회의 대표로서 라브라도 연안을 향해 항해하면서 ‘은둔의 나라’의 책을 읽었고, 한국에 대한 선교의 비전을 품었다. 1893년 여름 캐나다를 떠나 그해 말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여 황해도 지역 소래로 갔다. 그곳에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가 한국의 선교 상황을 소상하게 적은 편지를 캐나다장로교 총회 선교부에 전달하므로 한국의 최초의 총회선교부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소래에서의 지나친 사역으로 인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소천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소래교회 서경조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냄으로 1897년 총회는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자는 의견에 인준하였다. 그리고 핼리팩스 장로교대학 출신가운데 세 명의 선교사를 임명하였다. 그들이 바로 의사이며 목사인 그리어슨(Robert Grieson), 푸트(W. R. Foote) 그리고 선교사는 맥크래(Duncan M. Macrae)였다. 이들은 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후 1898년 9월 8일 한국에 도착하였다.101) 그 후 선교부는 함경도 지역을 맡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초기 장로교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시행한 사역은 각 선교부마다 차이가 있었다. 미북장로교(PCUSA)는 알렌을 중심으로 한 의료사역, 원두우를 중심으로 한 문화사역 그리고 마포삼열을 중심으로 한 성경학교 사역으로 일관되었다. 호주장로교회(PCV)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은 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전도을 통한 교회설립을 하였다. 미 남장로교(PCUS) 선교사들은 전주, 군산, 광주, 순천, 목포 등을 선교거점으로 정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설립하였다. 캐나다장로교(PCC) 선교사인 푸트, 맥래, 그리어슨은 1898년에 입국하여 학교사역, 주일학교 사역, 여성사역, 성경번역사업, 문서사업, 사회운동 등의 사역을 전개하였다. 적어도 1900년 이전까지의 선교사역의 중심은 미북장로교(PCUSA)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미북장로교로부터 파송한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93년 장로교 공의회가 결성됨으로 각 선교부들의 대표들과 한국인 대표들이 모임으로 협력과 양보의 정신으로 사역을 펼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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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1대 총회장 언더우드 목사옛날 예루살렘교회의 세 기둥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였다면, 한국 초대교회의 언더우드 아펜젤라 마펫은 바로 주춧돌과 같은 이 땅에 교회를 개척한 3대 개척 선교사였다. 조선선교 50주년을 맞은 신학지남은 이 들 선교사들의 고마움과 불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특집호를 실었는데 거기 서두에 이런 글이 나온다."그들은 손을 펴서 천주(天柱)를 만지려는 의기충천의 20당년에 순교자의 정렬을 품고 대양을 건너 우리 조선에 그 피를 부은 이들이다. 그들의 뿌린 씨가 백배 천 배의 열매를 맺어 50주년을 맞는 금일에 40만 가까운 신도를 가졌으니 감사할 바 아니랴"언더우드는 이들 중에 실지로 개척선교에 많은 공헌을 한 유일한 분이었다. 해리 로즈의 표현처럼 "개별 선교사들을 많이 한국에 오게 한 지도자"였고 스피어 박사는 "미국에 올 때마다 "선교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지칠 줄 모르는 참을 성 있는, 불굴의 사람"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다.그는 일찍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화학자요 발명가인 아버지 존 언더우드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잠시 그의 집안 내력을 보면 할아버지 토마스는 독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18세기 영국과 스코트랜드 교계에 명망이 높은 알렉산더 우오 목1사의 사위였으며 직업은 의학서적 등을 간행한 출판업자로서 진실한 분이었다. 아버지 존은 역시 신앙인으로 특별히 발명의 재질이 뛰어나 인쇄용 잉크, 타자기, 묵지(리본), 안전지 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예술원으로부터 메달과 표창을 받았던 과학자였다.외할아버지 알렉산더 와우 박사는 런던선교회 심사위원회 위원장이며 각 교파 교단과의 연합운동을 주도하면서 웰즈교회를 시무한 장로교 목사였다.그러고 보면 언더우드는 외조부의 연합정신과 친 할아버지의 사업수완과 아버지의 발명 재질을 겸한 만능 스타일의 인물이었다.그의 어릴 적 시절에 이런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언더우드는 예의 바른 소년으로 가게에 들어 설 때에는 언제나 모자를 벗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나올 때에는 모자를 놓고 나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일에 공상을 하다가 현재의 입장을 잊어버린 것으로 그의 건망증을 놓고 가족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성격이 훗날 미지의 땅에 선교의 꿈을 꾸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한 번은, 언더우드가 집에서 쓸 물건을 사기 위해 5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가게에 간 적이 있었다. 가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깊이 하면서 쥐고 있던 지폐를 한 조각 한 조각 찢어 버린 것이 가게에 거의 도착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이러한 행동을 낳은 정신구조는 훗날 그가 신경을 써야 하는 일에는 놀라운 집중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어릴 때 그는 형제들과 같이 히브리서 전체와 시편 119편 그리고 다른 성경요절을 외우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집안에서는 가족들이 모여 성경을 읽고 교회에서는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그는 의자 위에 올라가 정식 예배시간과 같이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했다. 언더우드는 13살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미국으로 건너가 화란교회에 등록, 장래 목사를 꿈꾸며 해스브룩 학원에 입학, 개인교수로부터 서양고전을 배웠다. 1881년 뉴욕대학교 졸업 후 뉴 부룬스위크 소재 화란개혁신학교를 84년에 졸업, 뉴욕대학교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인도 선교사로 갈려는 꿈을 접고 미지의 조선에 가기로 결심한 후 12월 16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도착 후 2개월 체류하는 동안 이수정과 다른 망명객들을 통해 조선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 성경을 가지고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아펜젤라 내외 등과 함께 도착했다. 어더우드는 7일에 입경한 지 3일이 되는 4월 10일부터 광혜원 의학 생들에게 물리화학을 교수하기 시작하여 그 후 31년간 조선선교를 위해 그의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며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한 후 1916년 10월 12일 향년 58세를 일기로 조선교회에 큰 업적을 남긴 채 미국 애틀랜타시에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백낙준 박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다음 8가지로 구분하여 그의 성격과 업적을 평한 바 있는데, 여기서는 4가지로 줄여 서술할까 한다.1. 선교사로서의 언더우드우리 말의 이름인 원두우 목사는 조선에 와서 다방면의 사업을 벌렸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선교사요 전도인이었다. 모든 활동은 전도사업의 보조사업으로 삼은 것이지 그것이 전업은 아니었다. 그는 경성과 소래에 교회를 처음으로 세웠고 경성과 경기서부 그리고 황해도 일대에 목사로 다년간 시무하였고 이 지방에 전도한 선교사였다.2. 학자로서의 어더우드그는 어학에 특별히 재주가 있어서 회화설교와 교수에 조선어를 무난히 사용했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4서3경을 이용할 정도였다. 그 외 서적과 전도서류의 편찬 신문발행 성경번역을 했다. 그가 신구약 성경을 번역할 때 가장 고심한 어휘가 하나님이었다. 처음엔 신<神>을 택할까? 천주<天主>나 상제<上帝>로 할까? 교계의 변론이 많았으나 하느님으로 하다가 최종 하나님으로 택한 것은 모두 그의 공적이었다.그리고 조선문화를 위해 조선어문법을 저술하였고 한영사전 간행 그 외에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문체와 철자법에도 그의 수고가 잘 반영되었다.3. 교육가로서의 언더우드그가 처음으로 입국하여 광혜원의 의과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조선교육의 문을 열었는데 그 후 고아원(경신학교 전신)과 예수교학교를 세웠으며 새문안교회 부속 협성소학교를 설립, 에비슨 박사와 협력 세브란스 의학교를 조직했다. 그리고 그가 시무하는 교회마다 초등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교회사역자 양성을 위해 피어슨성경학원 설립, 원장의 일을 보았다. 평양신학교 설립에 힘썼고 교회 각 학교를 위한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였고 사무실을 사저에 두기도 했다. 그는 말년에 경성에다 최고학부를 두기 위해 서북지역 교계 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다년간 몸소 겪으면서 결국 연희전문학교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마펫과의 학교 설립 이견으로 크게 상심하여 오늘날 후손들 사이에 교류가 없을 정도로 당시는 서북파와 비서북파 사이에 충돌은 컸다.4. 여행가로서의 언더우드그의 국내 전도여행은 1887년 10월부터 1914년까지 무려 11차에 걸쳐 강행되었는데 대체로 벽지의 교회 개척과 순회전도를 위한 것이었다. 전국을 통해 주요 지역에는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동경에도 여러 번 여행하였고 중국에도, 노령 해삼위에도 갔다. 시베리아 철도를 통해 유럽에 다녀왔고 인도양 바다를 거쳐 근동 각처와 성지순례를 하였고 유럽대륙을 수 차례, 미국과 카나다 각지를 순례하여 조선선교의 현황을 보고하였다. 이렇게 외국 여행을 많이 한 것은 여느 선교사들에게는 상상도할 수 없는 일로써 이 모두가 사업을 하는 형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5. 정치가로서의 언더우드그의 정치적 수완은 다른 사람의 역량 부족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데 있었다. 조선에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사업을 하게 한 것은 바로 언더우드의 공적이었다. 이눌서 일행에게 감동을 주고 그 열렬한 청년들을 위하여 재력을 동원함으로써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그리고 카나다에 가서 카나다장로교회로 하여금 조선에 사업을 착수케 한 것도 언더우드였다1910년에는 동료들과 협력, 조선을 홍보하기 위하여 미국 카나다 양국의 각지를 순회하여 새로운 많은 선교사들을 모집하고 근 20만 불의 거금을 후원 받아 교회 각 기관의 기초를 견고케 했다.6. 언더우드는 또한 비범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조선교회의 근본적인 원칙이란 자립경영 토착교회 설립 교파의 연합 등인데 이 모든 것을 다 그의 연구와 노력에서 기초를 세운 것이다. 교파간의 경쟁을 피하기 위하여 선교구역을 확정하고 또 각 선교기관을 연합하기 위해 선교사연합회를 조직했다. 또 서해안을 순회하다가 장연군 구미포가 선교사들의 휴양지로써 최적한 줄로 알고 땅을 매입하여 별장들을 짓게 한 것이다. 주야로 전도에 노력하는 선교사들에게 휴식의 필요성을 감안한 것도 바로 그의 정치적 수완이었다.7. 언더우드는 또 주색잡기에 허랑방탕한 조선의 청년들을 나라의 역군으로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중국과 일본의 청년회와 제휴하는 등 그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평화의 사자로서의 언더우드그가 조선에 머물던 31년간은 정치적으로 혼란과 갈등의 시기였다. 갑신정변 이후 청일전쟁, 노일전쟁, 을사조약, 한일병탄 등을 목도 했다. 그는 일찍 고종의 신망을 받던 인물로서 민비 시해 이후 고종의 신변상의 위험이 왔을 때 궁중에 들어가 전후 7주간 입궐숙직을 하였고 왕의 식탁음식에 독이 들어있는 지를 감식했다. 의친왕의 미국 유학 시에도 고종의 자문에 응하였고 그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다. 그리고 몇몇 인사들의 정치적 망명을 도왔는데 선교사로서 인도적 행동을 그 때 그때마다 과감히 보여줬다.8. 끝으로 그는 용기의 인물이었다. 어더우드 가문에 이런 가훈이 내려 오고 있다."불가능을 보고 비웃어라 그러면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laughs at impossibilities and it shall be done) 이런 생활상의 표어가 물론 성경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의 생애를 사로잡았다는 것이 돋보인다. 후퇴는 없었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와 거기에다가 맑은 양심, 꾸준한 노력, 그리고 밝은 희망을 가지고 진전했기 때문에 선교의 불모지 이 땅에 그토록 찬란한 금자탑을 세울 수가 있은 것이다.그의 용기는 신체적 고통을 참는 데도 볼 수가 있었다. 1910년 여름이었다. 장연군 구미포에 피서 차 갔다가 실족하여 발을 삐는 중상을 입었다. 그 곳엔 의료시설이 없었고 교통이 불편하였는데 상한 다리를 가지고 들것에 누어 이틀을 견디며 재령에 와서야 응급치료를 받았다. 이런 위급한 지경에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견뎌낸 것은 그의 정신적 용기가 큰 보탬이 되었다.그는 또한 만능 탤런트였다. 박사는 자기의 능력과 정력이 미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그냥 지 내친 것이 없다. 목수, 난방장치, 건축공사, 학문으로는 신학, 문학, 법학, 철학, 자연과학을 정통하였고 의학에 있어도 직간접적으로 공헌한 바 적지 않았다. 의학생을 교수하고 그 부인의 의료사업을 후원하였고 조선학에도 또한 조예가 깊었다. 어학, 사전, 고유종교, 풍속관습, 사회제도에 남겨둔 저술이 많다.사업에도 다방면이었다. 교회사업치고 그의 손길이 안간 데가 없다. 이처럼 다방면에 그의 수고가 가미 되어 진 만큼 그야말로 전 조선교회의 사람이었다. 한 지방에 국한되지 않고. 자기가 관계한 사업만 중시한 것이 아니라 경향의 차별이 없었고 전도, 교육, 의료사업에도 차이를 두지 아니했다. 모두 조선민족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본 것이다.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도 사람인지라 독단적이라는 동료들의 비난도 많이 들었고 조송하다는 비판도 없지 아니 했다. 넉넉한 선교비로 다른 선교사들로부터 부러움과 오해를 쌌지만 사실은 그 때나 오늘이나 그런 유의 비난과 비판은 늘 있어 온 것이었다. 그의 인격은 만대에 사표로 남아있고 그의 이상은 오늘 우리의 귀감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 언더우드의 기도문시 ♤ - 언더우드선교사 -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 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들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소중한 기도문을 이렇게 전합니다. 다시금 복음의 소중함과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귀하게 떨어짐의 감사함이 배로 넘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을 위한 막노동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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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선교현장, 알렌과 언더우드와의 갈등알랜 의료 선교사 알렌은 의사이고 언더우드는 목사이다. 의사 선교사인 알렌은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 보다 먼저 한국에 왔다. 알렌은 헤론이 입국할 때와 마찬가지고 언더우드가 입국할 때에도 첫 인상을 평가할 때 이미 서로간 갈등을 예고하고 있었다. 언더우드가 입국한 1885년 4월 5일 다음날에 기록한 알렌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언더우드 씨는 아주 빈틈없는 사람이고 사무적이고 민첩한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이 때문에 그는 오히려 자만에 빠지고 성급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의 성격으로 인해 장차 우리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더우드에 대한 알렌의 직감은 장차 두 사이에 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분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언더우드에 대한 알렌의 구체적인 평가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는]늘 자의식이 강한 장로교 가문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길쭉하고 챙이 있는 모자에다가, 흰 넥타이가 감추일 정도로 단추를 낀 검정 코트를 입고 그는 겁을 모르는 집사와도 같이 보였다. 또한 그의 굳굳한 턱, 높이 치켜든 머리는 그 역시 지배욕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명령을 받으려 하지도 않았고, 남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도 않았으며, 서울에서는 오직 하나 뿐인 칼빈주의 안수목사로서 자기가 다른 사람과 의견이 맟지 않을 때라도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알렌은 의사답게 신체의 부분을 잘 묘사해 가면서 나름대로 얼굴형과 성격을 연결지으며 평가하고 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는 알렌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언더우드와의 충돌은 의사와 목사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충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 초기 선교 현장에 서로의 주도권 싸움으로 갈등이 늘 존해 해 왔다는 것이다. 언더우드 편지에서 알렌과 헤론과의 관계에서 알렌은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문제를 지적한다. 심지어 알렌은 병원에서 헤론 의사와 관계된 일마저 헤론과 전혀 상의 없이 혼자 처리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은 언더우드가 평가한 갈등의 원인과 제공자가 알렌이었을 기록한 편지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료 사업과 관련된 계산서를 전적으로 알렌이 관리하고 있으며 감사를 받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 크지 않는 문제라 해도 의료사업 이외에 사용한 비용에 대해 헤론 의사는 알렌 의사에게 일일이 항목별로 계산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헤론 의사는 의료 비용에 대해 일체 의견을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중에 단 1원이라도 어떻게 사용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이제 알렌 의사에 대한 신뢰를 모두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일렌 의사는 이중적인 사람이며, 조금만 말씀드려도 그 사실은 드러날 것입니다.” 언드우드와 헤론, 그리고 알렌 사이의 갈등은 전적으로 알렌의 독선적 행정 스타일과 혼자 전횡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