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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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라고 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이 믿음의 원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으면 그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이 믿음의 원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그 믿음의 원리 안에서 충만한 믿음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기초적인 원리 하나를 말할 필요가 있다. ‘대 전제’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믿음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히브리서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믿음이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데 그 믿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불행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여 타락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 접근이 차단되었는가? 그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과 의로우심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선물’ 혹은 ‘은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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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3)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그리스도 일원론이라고 비판하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세상에 그 어떤 유명한 학자의 주장도 성경 계시를 직접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주인공, 구약의 메시지가 자신이라고 분명히 주장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에 누가 비판을 가할 수 있는가?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모세오경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해석법을 기반으로 하여 해석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해석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이에서 떠난 해석은 윤리 도덕에 그치고 영혼 구원과 신앙에 무관한 해석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를 위해 사도들과 수많은 주의 일꾼들이 생명을 헌신하고 노력해왔음을 기억하고 말씀의 사역자로 사명 감당해야 할 것이다. (김순정 목사 『구속역사적 성경연구 모세오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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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2)성경신학은 성경의 본질적 메시지인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따라서 그것이 구약의 본문이든지 신약의 본문이든지 그 본질적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을 해석할 때 구약 범위 안에만 머물러 있게 되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생명을 얻은 교회와는 무관한 해석이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교가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은 예언을 담고 있고, 모형이며, 그림자이다. 그리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이고, 모형과 그림자의 실체이다. 따라서 구약을 해석하고 이해할 때 신약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신약의 안경을 착용하고 구약을 바라보아야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미시시피주 잭슨 제일 장로교회 담임인 리건 덩컨 목사는 「십자가를 설교하라」는 책에서 “우리는 마땅히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강해식으로 설교해야 한다. 물론 구약의 어느 부분은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다루고 있지 않은데 억지로 연결해서 해석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본문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통하는 길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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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1)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그들의 종교 생활, 문화 상황적으로 해석을 시도했다. 그들의 해석 방법은 할라카와 하가다가 있는데 할라카(Halakah)는 히브리어로 ‘따라야 할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구약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행동과 원리들을 찾아내고 생활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하가다(Haggadah)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 제사법, 각종 신앙적 규범들을 생활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유대교는 랍비계, 헬라계, 쿰란계로 나누어져 약간의 해석적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할라카와 하가다의 해석법을 공통적으로 유지한다. 이런 유대교의 해석방법을 따르면 신약과 구약은 연결이 되지 않고 단절되며, 성경 전체의 중심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속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창 3:15; 요 3:16; 눅 24:44-48)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유대교의 해석법을 따르지 않는다. 유대교식 성경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설교 현장에서는 유대교의 해석법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점으로 등장한다. (김순정 목사 『구속역사적 성경연구 모세오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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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말한 이유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 설교할 것인가?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고지이다. 설교는 성경을 그 원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그분을 경외하며 숭배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믿음이 모호하면 신앙생활 자체도 모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설교와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우리 교회를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용서해 주시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훼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영생과 구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인간 땅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한다. 최근에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다함).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성경 읽기의 원리의 실제를 부제목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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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그리스도교)의 성경 이해와 설교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 설교할 것인가?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고지이다. 설교는 성경을 그 원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우 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그분을 경외하며 숭배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믿음이 모호하면 신앙생활 자체도 모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설교와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우리 교회를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용서해 주시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훼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영생과 구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인간 땅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한다. 최근에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다함).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성경 읽기의 원리의 실제를 부제목으로 했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 없는 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또 다른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든 성경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강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형식논리가 무너지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이해, 설교여야 한다. 이러한 형식논리를 리딩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핵심 논지를 놓치게 될 것이며, 2천 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독교(그리스도교)가 투쟁해 왔는가를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 바른 성경 이해와 하나님에 관한 계시에 의한 지식, 믿음,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으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반성 능력이 새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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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신지식종교개혁의 원리와 이신칭의를 강조할 때는 반드시 그 원인이 된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 계시로 적용되는지를 성령의 역사로 인지하고 믿어야 한다.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를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면서 여전히 구약성경을 이해하고 설교할 때는 유대인들과 같은 맥락에 멎은 경우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공로주의를 회개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 이를 근거로 한 신약성경을 부정하며 이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이란 용어 자체를 부정한다. 즉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라는 분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구약성경이라 하지 않고 ‘히브리어 성경’이라 한다. 히브리어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 즉 정경으로 본다. 유대인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부하며, 삼위일체,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 우리 그리스도인(기독교)이 바라보는 구약성경과 유대인이 바라보는 히브리어 성경은 내용은 같으나 그 해석은 전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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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마 28:1-17의 기록 마 28:1-17에 보면 안식일 즉 토요일이 지난 후 안식 후 첫날 즉 현대의 일요일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라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3일이 지난 일요일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기 위해 갔다. 그런데 그 무덤에는 큰 지진이 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 그 천사들의 모습을 보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때 나타난 천사가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5-7)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여자들을 만나주셨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가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린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제자들이 밤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을 하여 갔다고 퍼뜨리게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른다. 그러자 그곳에서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주님의 부활의 날=예배일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 새벽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켜 예배하였다. 즉 안식일의 예배가 일요일(주님의 날)의 예배로 바뀐 것이다. 행 20: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한다. 즉 한 주일을 시작하는 첫날인 일요일에 교회가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날이 일요일이고, 주님의 부활의 날이다. 이 날을 예배일로 지켰다. 부활의 증인들-여인들 또한 주님의 부활에서 증인들이 여럿이 등장한다. 일요일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그 증인들이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 28: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막 16:1-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눅 23:55-24:10)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요 20:1) 어떤 이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들이 여인을 비하하고 남녀차별을 하여 여인들을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다고 우겨댄다. 그러나 성경과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여인들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증인들-제자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여기에 보면 부활의 증인이 게바 즉 베드로, 12명의 제자들, 500여 제자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그 후에 모든 사도들 즉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사도 바울이 증인이다. 모세5경에 의하면 법정에서 어떤 사실에 대해 필요한 증인의 수는 한 명으로는 안되고 두세 명으로 정하고 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 예수님의 증인의 명단을 보면 이 법을 충분히 만족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 제7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7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인류의 죄와 부패한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고자하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로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이루었고 또 그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영원한 아들이 참사람이 되사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났으되 오직 죄는 없는 자시라.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 몸을 드려 참되고 온전한 제물이 되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승좌하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저리로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신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즉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 조항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신앙 조항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2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2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에서 어떻게 높아지셨는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에서 높아지심은 그가 사망에게 매여있을 수 없어 사망중에 썩음을 보지 않으시고 고난 받으신 몸이 본질적 특성들을 가졌으나 사망성과 기타 현세에 속하는 공통적 연약성이 없이 바로 그 같은 몸이 그의 영혼과 실지로 연합되어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사망과 사망의 권세 잡은 자를 정복하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을 친히 선포하셨다. 그가 공적 인물로서, 자기 교회의 머리로서 하신 모든 것은 그들을 칭의하시고 은혜로 살리시고 원수들에 대항하여 지원하시어 마지막날에 그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신 것이었다.(행 2:24, 시 16:10, 눅 24:39, 골 1:18, 요 10:18, 롬 1:4, 4:25, 히 2:14, 롬 14:9, 고전 15:21∼22, 엡 1:22∼23, 롬 4:25, 엡 2:56, 고전 15:25∼26, 고전 15:20, 살전 4:13∼18).”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의 영혼과 육체가 연합되어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히 선언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조 개혁파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주 예수는 그 직분을 가장 기꺼이 떠맡으시고(21)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나시고(22),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셨다(23). 그 영혼에 극심한 괴로움을 직접적으로 참으시고(24), 그의 신체에 가장 아픈 고난을 견디시고(25),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26),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머물러 계셨으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27), 삼일 만에 그는 고난을 받으신 그 동일한 몸으로(28),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29), 또 그 몸을 가지고 하늘에 오르사그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30), 간구하시는데(31), 세상 끝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32). (21) 사 40:7, 8, 빌 2:5∼8 (22) 갈 4:4 (23) 마 3:15, 요 17:4 (24) 마 26:37, 38, 눅 22:44, 마 27:46 (25)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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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만남, 그리고 동행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므로(담후 3:16) 성경의 역사성과 권위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역사적이라고 믿은 사건의 실상을 부인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긍정할 수 없다. 더구나 우리는 성경이 다른 어떤 책과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는 성경만이 특별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주장을 긍정하는 수준이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수준을 보여준다(제이슨 S. 두루치, 『구약,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88)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 말씀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은 언약 백성의 제사와 제물 가운데 가능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인간 안에 내제된 자율성에 의해 하나님의 만나고 동행한 것이 아니라 제사와 제물을 통한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다. 언약, 제사, 제물, 자비, 긍휼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행해 주시고 만나주신다. 구약에서 동행과 함께 하심은 바로 이에 대한 약속이며, 예언이며, 신약에서 성취에 대한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적용된다. 열심있는 인간의 행위를 충동질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형식은 성경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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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무능력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로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 일이 없다. 사람이 순종하고 공로를 세우고 선행으로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없다. 창세기 1: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고 그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는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께 반응하고 대화하고 예배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이런 인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존재는 우리밖에 없다. 세상에는 누구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고 찬양하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부터 계획하고 만드신 결과가 우리가 인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가 되려면 그 깊은 감정을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인격적인 관계는 그저 알고 지내는 것만이 아니고 그때부터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최고의 경지까지 나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