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단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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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라고 한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이 믿음의 원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으면 그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나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면 이 믿음의 원리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이그 믿음의 원리 안에서 충만한 믿음 생활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기초적인 원리 하나를 말할 필요가 있다. ‘대 전제’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믿음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히브리서 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믿음이 우리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데 그 믿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 불행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죄를 범하여 타락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왜 접근이 차단되었는가? 그 이유는 우리는 죄인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과 의로우심이다. 만약에 우리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선물’ 혹은 ‘은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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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3)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그리스도 일원론이라고 비판하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잘못 이해한 결과이다. 세상에 그 어떤 유명한 학자의 주장도 성경 계시를 직접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주인공, 구약의 메시지가 자신이라고 분명히 주장하셨다. 그렇다면 여기에 누가 비판을 가할 수 있는가?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4-48) 모세오경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해석법을 기반으로 하여 해석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해석법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이에서 떠난 해석은 윤리 도덕에 그치고 영혼 구원과 신앙에 무관한 해석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를 위해 사도들과 수많은 주의 일꾼들이 생명을 헌신하고 노력해왔음을 기억하고 말씀의 사역자로 사명 감당해야 할 것이다. (김순정 목사 『구속역사적 성경연구 모세오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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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2)성경신학은 성경의 본질적 메시지인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따라서 그것이 구약의 본문이든지 신약의 본문이든지 그 본질적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을 해석할 때 구약 범위 안에만 머물러 있게 되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생명을 얻은 교회와는 무관한 해석이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대교가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은 예언을 담고 있고, 모형이며, 그림자이다. 그리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이고, 모형과 그림자의 실체이다. 따라서 구약을 해석하고 이해할 때 신약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신약의 안경을 착용하고 구약을 바라보아야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미시시피주 잭슨 제일 장로교회 담임인 리건 덩컨 목사는 「십자가를 설교하라」는 책에서 “우리는 마땅히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자연스럽게 강해식으로 설교해야 한다. 물론 구약의 어느 부분은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다루고 있지 않은데 억지로 연결해서 해석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본문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통하는 길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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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1)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그들의 종교 생활, 문화 상황적으로 해석을 시도했다. 그들의 해석 방법은 할라카와 하가다가 있는데 할라카(Halakah)는 히브리어로 ‘따라야 할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구약성경을 통해서 인간의 행동과 원리들을 찾아내고 생활에 적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하가다(Haggadah)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 제사법, 각종 신앙적 규범들을 생활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유대교는 랍비계, 헬라계, 쿰란계로 나누어져 약간의 해석적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할라카와 하가다의 해석법을 공통적으로 유지한다. 이런 유대교의 해석방법을 따르면 신약과 구약은 연결이 되지 않고 단절되며, 성경 전체의 중심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속역사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창 3:15; 요 3:16; 눅 24:44-48)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신교회는 유대교의 해석법을 따르지 않는다. 유대교식 성경관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설교 현장에서는 유대교의 해석법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점으로 등장한다. (김순정 목사 『구속역사적 성경연구 모세오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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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말한 이유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 설교할 것인가?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고지이다. 설교는 성경을 그 원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그분을 경외하며 숭배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믿음이 모호하면 신앙생활 자체도 모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설교와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우리 교회를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용서해 주시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훼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영생과 구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인간 땅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한다. 최근에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다함).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성경 읽기의 원리의 실제를 부제목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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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신지식종교개혁의 원리와 이신칭의를 강조할 때는 반드시 그 원인이 된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 계시로 적용되는지를 성령의 역사로 인지하고 믿어야 한다.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를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면서 여전히 구약성경을 이해하고 설교할 때는 유대인들과 같은 맥락에 멎은 경우들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공로주의를 회개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 이를 근거로 한 신약성경을 부정하며 이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이란 용어 자체를 부정한다. 즉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라는 분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구약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구약성경이라 하지 않고 ‘히브리어 성경’이라 한다. 히브리어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 즉 정경으로 본다. 유대인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거부하며, 삼위일체,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 우리 그리스도인(기독교)이 바라보는 구약성경과 유대인이 바라보는 히브리어 성경은 내용은 같으나 그 해석은 전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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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만남, 그리고 동행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므로(담후 3:16) 성경의 역사성과 권위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이 역사적이라고 믿은 사건의 실상을 부인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긍정할 수 없다. 더구나 우리는 성경이 다른 어떤 책과도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이는 성경만이 특별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주장을 긍정하는 수준이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수준을 보여준다(제이슨 S. 두루치, 『구약,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88) 성경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끊임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 말씀한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동행은 언약 백성의 제사와 제물 가운데 가능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인간 안에 내제된 자율성에 의해 하나님의 만나고 동행한 것이 아니라 제사와 제물을 통한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다. 언약, 제사, 제물, 자비, 긍휼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행해 주시고 만나주신다. 구약에서 동행과 함께 하심은 바로 이에 대한 약속이며, 예언이며, 신약에서 성취에 대한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적용된다. 열심있는 인간의 행위를 충동질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형식은 성경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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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인간이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무능력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로 구원받는 길을 제시한 일이 없다. 사람이 순종하고 공로를 세우고 선행으로 구원받는 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없다. 창세기 1: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으로 우리를 만드셨고 그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는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께 반응하고 대화하고 예배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이런 인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존재는 우리밖에 없다. 세상에는 누구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고 찬양하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사람이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부터 계획하고 만드신 결과가 우리가 인격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가 되려면 그 깊은 감정을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전달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인격적인 관계는 그저 알고 지내는 것만이 아니고 그때부터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최고의 경지까지 나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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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봐야 한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미워하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율법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한번 악하다고, 혹은 선하다고 말씀하시면 영원히 악하고 영원히 선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율법이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하나님 성품의 묘사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드러냈는데 그것이 율법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 하였다면 그것은 살인은 영원히 나쁘다고 보는 것이다. 율법은 이렇게 선한 것인데 “율법은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는 하는데 이 말은 “율법이 곧 하나님과 원수다”라는 말이 아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 율법은 선하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율법이 악해서가 아니라 이 율법을 사용하는 사람(유대인)의 방법과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원래 목적대로 율법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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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식의 근거인 성경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당연히 성경에서 왔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이다. 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신앙에 대한 바른 권위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적 권위가 있을 때 그 성경에서 기록된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으로 권위가 있다. 우리가 믿는 신지식의 근거와 권위는 신적 권위를 가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2년 기독교회는 성경의 신적 권위와 더불어 신지식의 권위, 즉 그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기독교회의 존폐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이 문제가 무너지면 기독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신앙의 근본 권위에 대한 문제를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논점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성경은 신적 권위를 갖는 신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신지식에 대한 권위의 근거가 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의 구주이며,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를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진리는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갖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