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단 뉴스목록
-
기독교(그리스도교)의 성경 이해와 설교성경을 어떻게 이해하여 설교할 것인가? 설교는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넘어야 할 태산과 같은 고지이다. 설교는 성경을 그 원천으로 하여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는가? 우 리는 성경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면서 그분을 경외하며 숭배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성경에 대한 하나님에 관한 이해와 믿음이 모호하면 신앙생활 자체도 모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그 성경 계시를 통해 하나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오늘날 설교와 신앙생활의 전 영역에서 너무나도 소중하다. 우리 교회를 기독교(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구원을 말할 때 죄로부터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그냥 용서해 주시는 일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훼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에게 임하여야 영생과 구원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영생과 구원을 받는 방법은 인간 땅에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구원이 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기독교)라고 한다. 최근에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도서출판 다함). 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와 성경 읽기의 원리의 실제를 부제목으로 했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하게 질문해야 하는 것은 왜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변이 없는 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또 다른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든 성경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강조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강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형식논리가 무너지면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적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이해, 설교여야 한다. 이러한 형식논리를 리딩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핵심 논지를 놓치게 될 것이며, 2천 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독교(그리스도교)가 투쟁해 왔는가를 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 바른 성경 이해와 하나님에 관한 계시에 의한 지식, 믿음,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으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여기에 자신의 반성 능력이 새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소재열 목사)
-
부활의 주님마 28:1-17의 기록 마 28:1-17에 보면 안식일 즉 토요일이 지난 후 안식 후 첫날 즉 현대의 일요일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라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셨다. 3일이 지난 일요일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기 위해 갔다. 그런데 그 무덤에는 큰 지진이 나고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 그 천사들의 모습을 보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 그때 나타난 천사가 여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5-7)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여자들을 만나주셨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하셨다.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몇 사람이 성에 들어가 모든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린다.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제자들이 밤에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을 하여 갔다고 퍼뜨리게 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른다. 그러자 그곳에서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주님의 부활의 날=예배일 이 기록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일요일 새벽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는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켜 예배하였다. 즉 안식일의 예배가 일요일(주님의 날)의 예배로 바뀐 것이다. 행 20:7절에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한다. 즉 한 주일을 시작하는 첫날인 일요일에 교회가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날이 일요일이고, 주님의 부활의 날이다. 이 날을 예배일로 지켰다. 부활의 증인들-여인들 또한 주님의 부활에서 증인들이 여럿이 등장한다. 일요일 새벽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그 증인들이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마 28: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막 16:1-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눅 23:55-24:10)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요 20:1) 어떤 이들은 성경과 성경의 저자들이 여인을 비하하고 남녀차별을 하여 여인들을 증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다고 우겨댄다. 그러나 성경과 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여인들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증인들-제자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1-8) 여기에 보면 부활의 증인이 게바 즉 베드로, 12명의 제자들, 500여 제자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그 후에 모든 사도들 즉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 사도 바울이 증인이다. 모세5경에 의하면 법정에서 어떤 사실에 대해 필요한 증인의 수는 한 명으로는 안되고 두세 명으로 정하고 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 예수님의 증인의 명단을 보면 이 법을 충분히 만족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조 제7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7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인류의 죄와 부패한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고자하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로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이루었고 또 그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영원한 아들이 참사람이 되사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났으되 오직 죄는 없는 자시라.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 몸을 드려 참되고 온전한 제물이 되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승좌하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저리로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신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즉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 조항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신앙 조항으로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2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2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에서 어떻게 높아지셨는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에서 높아지심은 그가 사망에게 매여있을 수 없어 사망중에 썩음을 보지 않으시고 고난 받으신 몸이 본질적 특성들을 가졌으나 사망성과 기타 현세에 속하는 공통적 연약성이 없이 바로 그 같은 몸이 그의 영혼과 실지로 연합되어 자기 자신의 권능으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사망과 사망의 권세 잡은 자를 정복하심으로 산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심을 친히 선포하셨다. 그가 공적 인물로서, 자기 교회의 머리로서 하신 모든 것은 그들을 칭의하시고 은혜로 살리시고 원수들에 대항하여 지원하시어 마지막날에 그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신 것이었다.(행 2:24, 시 16:10, 눅 24:39, 골 1:18, 요 10:18, 롬 1:4, 4:25, 히 2:14, 롬 14:9, 고전 15:21∼22, 엡 1:22∼23, 롬 4:25, 엡 2:56, 고전 15:25∼26, 고전 15:20, 살전 4:13∼18).”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셨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실제로 그분의 영혼과 육체가 연합되어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확실히 선언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조 개혁파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8장 4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언급한다. “주 예수는 그 직분을 가장 기꺼이 떠맡으시고(21) 이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 아래 나시고(22), 율법을 완전히 수행하셨다(23). 그 영혼에 극심한 괴로움을 직접적으로 참으시고(24), 그의 신체에 가장 아픈 고난을 견디시고(25),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26), 장사되어 사망의 권세 아래 머물러 계셨으나 썩음을 보지 않으셨다(27), 삼일 만에 그는 고난을 받으신 그 동일한 몸으로(28),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29), 또 그 몸을 가지고 하늘에 오르사그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셔서(30), 간구하시는데(31), 세상 끝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32). (21) 사 40:7, 8, 빌 2:5∼8 (22) 갈 4:4 (23) 마 3:15, 요 17:4 (24) 마 26:37, 38, 눅 22:44, 마 27:46 (25) 마
-
한국선교 시발점은 1884년이 아닌 1879년한국 기독교회가 선교사의 입국한 날(1884. 9.20)을 선교 시발점이 아닌 한국인 최초로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파송 받은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1879년 최초로 백홍준,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등이 세례를 받아 성경 번역과 서북지역에서 전도했던 그해를 한국교회 선교 출발로 삼아야 한다. 한국에 주재한 장로회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초기 역사를 자신들의 선교역사를 중심으로 모든 행사를 기록하여 왔다. 특히 한국교회 선교 출발을 언제로 하여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한국에 주재한 장로회 선교사들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소속 알렌의 입국인 1884. 9. 20.을 기준으로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 기준에 의해 한국 교회 선교 50년 희년 대회를 1934년에 가졌다. 이 모든 것은 북장로회선교부 중심적 역사 평가와 기록이었다. 알렌 선교사가 입국하여 한국의 기독교회가 출발한 1884년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 사역의 시작을 한국교회 선교 출발로 삼아 교회 역사를 집대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1884. 9. 20. 안수받지 않는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과 1885. 4. 5. 오후 3시에 입국한 안수받은 목사 선교사인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을 최초의 선교, 목사 선교사 최초의 입국 등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
구약 정경에 대한 명칭구약정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그 기록된 시점부터 정경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하여 구약정경의 목록이 확정된 뒤 기독교는 그 구약정경을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의 성경이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유대인의 구약정경의 목록의 수는 그대로 수용하였으나 몇 가지 고친 것이 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내용상으로는 동일하나 형식면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독교회가 사용하는 구약정경은 창세기로 시작하여 말라기로 끝마칩니다. 그 밖에도 양자는 각 책의 장과 절의 모양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 히브리어 원문은 여호와와 다른 이방신을 지칭할 때 ‘엘’이나 ‘앨로힘’이라는 단어를 공통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현재 한국 개역성경은 하나님 또는 신으로 번역하였습니다(최의원, 『세즈믄 우리말 구약정경, 머리말 중에서). 유대교에서는 우리 기독교가 말한 구약성경에 해당한 ‘히브리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정경으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정경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정경으로 채택하여 구약성경이라 하고 별도로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채택했습니다.
-
안식일 제도로서의 사회복지 제도안식일 제도는 하나님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한 인간 사랑을 담고 있는 사회복지제도이다.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 일시적으로 멈추어지는 날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경험하게 하는 날이다. 또한 주5일제 도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만끽하고 신앙을 생활화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날이다. 출애굽기 16장에 나타난 만나를 거두는 사건을 보면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완전한 휴식을 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는데, 쉬어야 할 시간에 노동을 중지하고 쉬지 않으면 그것은 안식의 시간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출애굽기 23:10-11에 처음으로 안식년의 시행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 안식제도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보호하는 사회적 계명(1-9절)과 순례자들의 축제의식 등에 관한 계명(14-17절)을 연결 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6일간 노동을 하고 제7일째 휴식을 하는 안식일 제도의 기원은 이스라엘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7일을 주기로 휴식을 명하는 안식일 제도의 제정 목적과 동기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로써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안식에 참여하는 대상은 가족(너와 네 아들과 딸), 사회적 약자(네 남종과 여종, 네 문안에 유하는 나그네), 동물(네 소와 나귀와 모든 가축)과 자연계에까지 확대된다. 성경의 안식일 제도는 전우주적이며, 전 세계적으로,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한 차원 높은 사회복지제도이다. 일반사회복지의 개념은 근래에 들어서야 보완적 개념에서 제도적 개념으로, 자선에서 시민의 권리로, 특수적 서비스(빈민)에서 보편적 서비스(전체 국민)로, 최저 조건에서 최적 조건(문화적 생활)의 서비스로, 자발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공공성)으로, 빈민구제 차원에서 복지사회의 건설로, 개인적 변화에서 사회적 개혁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안식일 제도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 대한 권리와 자연에 대한 권리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창조 시 만들어져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주어진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을 나타내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고 있는 제도로 진정한 사회복지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하기위해 주어진 제도이다. 사회복지제도 역시 성경에 담겨진 인간존중의 사상과 제도에서 발견해낸 보배 중의 하나이다. 초기의 사회복지제도가 교회에서 시작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다가 근래에야 국가에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이런 주장의 뒷받침해준다. 사회복지의 기본이념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자기결정권, 균등한 기회, 사회적 책임을 강조 한다. 성경적 사회복지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삶과 정신을 이 땅에 구현하는 것으로 사회복지 이념의 모체요, 실천의 모델이 된다. 안식일은 6일 동안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노동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유지가 불가능하게 되는 소외의 현실을 막는 인간화의 제도이다. 아카드 하암(Achad Haam)은 “우리는 유대인이 안식을 보존했다기보다는 안식일이 유대인을 보존했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이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안식일이 유대인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고 매주 그들의 영적인 삶을 새롭게 해주지 않았다면, 유대인은 평일의 침울한 경험들 때문에 너무나 절망하여 물질주의와 도덕적, 지적 타락의 바닥에까지 떨어졌을 것이다”고 했는데,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왔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사회복지제도나 안식일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품격을 고양시키기 위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제도이다. 기독교인들의 사회복지 활동은 불평등의 구조에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며, 이미 와 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가는 길이다. 최고의 실천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으로 일반사회복지의 가치와 실천을 넘어선 영적인 차원까지 접근해야 한다. 김종택 목사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항존직, 3직제와 2직제 구분한국에 복음이 전해졌다.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해외 선교부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장로회 정치를 사용하는 장로회 선교사들이 장로교회를 세웠다. 1907년 한국 자국민에 의한 독립 노회가 조직되었다. 이 노회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라 한다. 이어 1912년 9월 1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제1회 총회장은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한국에 파송된 미국의 여선교사와 결혼한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아직 일제강점기 시절이므로 미국 선교사를 총회장으로 세워 일본 조선 총독부와 원활한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총회가 조직된 후 1921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다음 해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출간되었다. 이 헌법이 오늘의 헌법으로 이어지고 있다. 장로회 교파마다 약간씩 수정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가장 충실하게 보존하여 사용하고 있는 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이다. 제1회 총회에서 중요 결의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총회 산하 모든 지교회는 교회 명칭 앞에 “조선예수교장로회”을 붙이기로 하였다. 이 명칭은 조선에 소속된 장로회 정치와 교리에 의해 운영된 교회라는 의미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장로회 정치원리를 규정하고 교회 직원을 규정하였다. 교회 직원을 세워 교회를 치리하고 운영한다. 그 직원을 항존직(恒存職)이라 한다. 교회가 설립되면서 교회를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직원이라 하여 이를 항존직이라 한다. 직원인 항존직은 목사, 장로, 집사이다. 칼빈은 개혁교회의 4직제를 완성했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였다. 칼빈의 4직제와 미국 북장로회의 3직제인 목사, 장로, 집사가 있었다. 미국 남장로회는 2직제로 하였다. 장로(목사, 장로)와 집사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헌법 제3장 제2조 ‘교회의 항존직(恒存職)’에 의하면 “교회에 항존(恒存)할 직원은 다음과 같으니 장로(감독) (행 20:17, 28, 딤전 3:7)와 집사요, 장로는 두 반이 있으니 1. 강도(講道)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일컫고, 2.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일컫나니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 3. 항존직의 시무 연한은 만 70세로 한다.”라고 했다.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을 제정할 때 미국의 북장로회 헌법을 번역하면서 항존직에 대해서 미국 북장로회 헌법을 따르지 않고 미국 남장로회 헌법을 따랐다. 교회 항존직을 3직제가 아닌 2직제로 하였다. 그러면서 제2항에 치리만 있는 장로를 “교인의 대표자”라는 규정은 미국 남장로회 헌법이 아닌 미국 장로회 헌법을 채용했다. 이런 제정 절차를 따라 오늘날 장로회 헌법은 교회 항존직을 2직제로 하여 장로(목사, 장로)와 집사로 하고 있다. 그러나 통합 측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초기 헌법에서 전면 개정을 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 헌법 역시 2직제로 하되 여기에 권사를 항존직에 포함했다. “항존직은 장로, 집사, 권사이며”라고 규정한다. 항존직은 안수하여 세운다. 합동 측은 여성 안수가 없으므로 권사는 안수하여 세우지 않고 취임하는 형태로 한다. 그래서 권사는 항존직에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합 측은 여성 안수를 허용하고 있으며, 그 권사를 항존직에 포함한다. 이처럼 교단 헌법은 2직제로 규정하고 있지만 각 교회 정관에는 3직제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각 교회는 교단 헌법의 이러한 2직제인 장로(목사, 장로)와 집사가 아닌 3직제인 목사, 장로, 집사로 교회정관을 제정하고 있다. 강도권과 치리를 겸한 목사와 치리만을 위한 장로, 그리고 집사로 하고 있다. 즉, ‘목사, 장로, 집사’인 3직제로 교회 정관을 규정하여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소재열 목사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로부터 기독교가 존재목사의 직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연구하는 일이다. 목회 사역의 원천은 성경이다. 그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초석이며, 목회의 원천임과 동시에 성도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근원이다. 성경이란 ‘거룩한 책’으로 66권으로 확정되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구약 히브리 민족이 보물로 간직해 온 모세 율법과 시편, 선지서 등은 하나님의 말씀, 거룩한 문헌 등은 보물이었다. 원본은 없지만, 그 원본을 필사한 사본들이 보존되어 구약의 39권은 정경으로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립되었다. 39권 외에 유사한 문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런 문헌들은 정경인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약성경 역시 27권 정경으로 확정되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1세기 공동체에 전해졌던 다양한 문헌들은 신앙의 공동체에 많은 유익을 주었다. 그러나 많은 문헌 속에 27권을 정경으로 받아 오늘날 66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이 66권의 거룩한 책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2천 년 교회사는 이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부류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전해 내려오는 여러 문서를 한 권으로 편집한 책이라고 말한 부류도 있었다. 심지어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그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있다고 주장한 부류가 있었다. 정통 기독교는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이 믿음이 무너질 때 기독교의 존재 기초가 무너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독교 존폐 차원에서 접근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무너지면 기독교는 무너지고 만다. 왜 그럴까? 그 성경에서 언급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부정되면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은 거짓이 되고 만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이시다. 그 성경이 부정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부정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과 여기에 덧붙여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지닌다. 즉 신적 권위를 가진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의 근거가 된다. 성경의 원본은 없다. 대신 원본을 필사한 사본들만이 존재한다. 그 사본도 같은 종류의 사본이 아니라 여러 사본이 존재한다. 그 사본 중에 권위 있는 사본은 어떤 사본인가? 권위 있는 사본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문제는 기독교 2천 년 동안 연구되고 논쟁했던 문제 중의 하나이다. 신적 권위를 가진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은 신약성경을 전제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이라고 하지 않고 ‘히브리어 성경’이라고 한다. 목사는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한다. 성경 교사로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에 가정 먼저 이야기 되는 문제가 바로 ‘성경의 신적 권위’이다. 이를 전제하지 않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는 이러한 성경의 권위를 믿지 않을 경우, 그 어떤 직분을 받을 수 없다. 심지어 장로교회의 교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장로회 12 신조라는 것이 있다. 장로회의 기둥과 같은 12개의 신조 중에 제1조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本分)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이다. 성경에 대한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이해되고 믿어질 때 다음은 그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즉 신지식에 대한 문제로 이어진다. (계속)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
말씀으로 돌아가자여전히 우리 교회 현실들은 녹록치 않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초기 선교사역의 힘은 성경공부였고 사경회였다. 오늘날 교회가 말씀에서 멀어져 갈 때 희망은 우리들에게서 멀어져 간다. 이런 경우 교회의 본질적인 핵심 가치는 상실되고 만다. 하지만 여전히 교회의 힘은 말씀이다. 성경으로 돌아가 회복운동을 펼치는 길 밖에 없다. 1. 인간의 반역과 저주의 형벌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되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형벌을 받았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거부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았다. 2. 계시의 필요성 하나님 앞에 범죄 하여 저주의 형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아야 하는 인간 중심인가, 아니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중심인가?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라는 지식은 결국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문제로 귀착된다. 따라서 우리들의 구원이라는 문제는 결국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자기계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성경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제일 좋은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이라고 하여, ‘제일계시’가 아닌 ‘유일계시’라 한다. 3. 성경은 신지식에 대한 보고 성경은 신지식에 대한 보고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알 수 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증거 된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계시하실 수 있다. 성경은 다양한 사건들, 역사 이야기, 인물들의 인물전과 같은 기록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한 방편이며, 이러한 수단과 방편이 핵심 주제가 아니다. 이러한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려주는 것이 성경이며, 이 성경은 신지식에 대한 유일한 특별계시이다. 따라서 성경을 외면하고서는 신앙의 원천인 신지식은 불가능하다. 성경을 통하지 않는 신(神)은 범신론(汎神論)일 뿐이다. 성경을 통한 신지식에 대한 무지는 결국 신앙의 무지로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들의 신앙과 한국교회를 회복케 하는 원천임에는 틀림없다. 4.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 성경은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로 하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언약을 체결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서철원, 교의신학 구원론, 25).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반역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다. 인간 이성이 어두워져 버렸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죄악의 몸부림뿐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현주소이다. 이제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인간 자체 내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해졌다. 이제 인간 쪽에서가 아닌 하나님 쪽에서 우리들에게 임해야 한다. ‘상향’이 아니라 ‘하향’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이다. 하나님 쪽에서 우리 인간에게로 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어두워진 이성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로 계획을 세우셨다. 여기서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의심이라”(빌 2:6-8)라고 하신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육신에 대한 진리를 믿을 때에만 우리들에게 구원이 있게 된다. 이를 2천년 동안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와 성육신 교리로 집대성했고 이같은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 두 교리를 믿지 아니하면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은 불가능하다. 5. 예수 그리스도 구속사역과 성령의 적용사역 하나님은 반역한 인간을 전멸하지 아니하시고 보존하시로 작성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하여 나타났으며, 그의 피 흘리심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셨다. 객관적으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관적으로 적용케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 ①복음 증거 ②거듭남 ②신앙고백을 하게 하신다. 이같은 성령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구원사역, 복음 선포 형식과 연결된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회개케 하시고, 믿게 하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게 하신다. 신앙고백과 믿음의 고백은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의 구주로 믿게 하신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원을 받게 하신다. 믿는 자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성령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에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복음의 선포와 믿음을 고백한 자들에게는 죄 용서의 은혜를 주신다. 이를 우리는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를 전문 용어로 ‘법정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법정에서 판사가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처분하는 것과 같다. 서철원 박사는 법정적 선언으로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이는 ‘도덕적 칭의’는 아니라고 한다(교의신학, 구원론, 29).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들은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성화 과정을 통하여 죄의 욕망을 죽이는 일을 한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6.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심 믿는 자들이 믿음고백을 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은혜와 생명과 힘을 주신다. 이 은사들로 믿는 자들은 죄와 싸워 이기며 거룩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믿는 자들은 살아갈 수가 없다. 믿는 자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이 그들로 죄에 탐익할 수 없게 하고 죄를 싫어하고 버리게 한다(서철원, 교의신학 구원론, 198). 이같이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7. 복음 전도 복음 선포인 전도를 통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있다. 복음 선포 형식이 있다.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히 믿는 자들에게 실효적 부르심을 통해 우리들을 구원하신다. 복음 선포가 효력이 있으려면 성령이 역사하셔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의 충만함이 없다면 전도자가 될 수 없다. 전도는 ① 하나님의 창조 ②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 ③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여야 한다. 전도자는 복음의 핵심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고 피 흘리셨다고 전파해야 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셨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온전한 복음의 내용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들을 믿게 하신다.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에게도 복음의 내용을 잘 가르치고 준비시켜 복음을 널리 전파하게 해야 한다(서철원, 교의신학 구원론, 54). 8. 설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소개한다.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전하고자 하는 본문 말씀을 해석하여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설교이다. 이신칭의 교리만을 전하는 것이 설교가 다가 아니다. 교리에 근거하여 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교리강의를 설교라고 할 수는 없다. 성도들을 위로하는 설교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용일변도의 설교 역시 한계가 있다. 이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를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하여야 하는 것인지 이제 정직하게 질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9. 변화와 회복 교회의 회복, 성도들의 삶의 변화는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 기본은 다름아닌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국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철저한 성경공부가 있었다. 일명 ‘사경회’였다. ‘부흥회’는 ‘사경회’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복음의 본질이 이해되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온갖 분쟁이 교회를 파멸시키고 있다. 교회 회복은 결국 성경인 복음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10. 결론 루터는 성령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신다고 했다. 칼빈은 성령이 주권적으로 일하시므로 말씀과 함께 사역하신다고 설명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진정한 전도도 설교도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 교회는 회복과 우리들의 삶은 풍성해 질 것이다. 이제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성경 연구에 충실하도록 하자.
-
한국교회,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예배논쟁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코로나19 확산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에 함께 동참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단체의 미사, 법회, 예배를 당분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는 대구 신천지 집단에서 감염자가 무더기로 발생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개혁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를 전제하면서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에 충실한다. 또한 ‘보이는 교회’에 충실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관을 갖고 있다. 이같은 교회관은 칼빈의 교회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론’만을 추구하는 교회관을 갖고 있는 자들은 언제나 분쟁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한국장로교회는 이러한 역사의 아픔을 겪어왔다. 무형교회만이 아닌 유형교회와의 적절한 관계 속에서 교회를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현대 교회 분쟁의 원인 중에 이러한 교회관에 기인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무형교회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유형교회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함으로 상대를 정죄하는 성향이 오늘의 한국교회 분쟁의 현주소이다. 보이는 유형교회는 조직이 필요하고 찬송가와 예배모범이 필요하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특정 장소가 필요하다. 그 특정 장소는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이다. 그 건물 자체는 본질이 아니다. 그 건물인 예배당 안에 모인 교인들의 모임을 교회라 한다. 이러한 신학적인 개념은 현대교회 분쟁에서 교회처분인가, 예배당 처분인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한다. 예배당 처분을 교회 처분으로 했다가 명예훼손에 휘말리기도 한다. 총회(예장합동)는 이런 이유 때문에 불법으로 예배당을 처분한 행위를 교회처분으로 처단하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보이는 유형교회는 지상의 조직교회로서 그 교회 교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영원한 세계를 지향한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부족하고 연약하다. 그래서 늘 상대를 이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야 한다. 그래서 지상의 유형교회는 조직이 필요하되 그 조직은 특정인과 특정 기관에 권력의 독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원리가 삼권 분립의 근거가 된다. 인간은 연역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COVID-19)는 국가적인 재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사람과 사람의 접촉, 즉 감염자와 접촉으로 감염되어 아직 치료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상태에서 두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집단 감염이 현실화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에 함께 동참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단체의 미사, 법회, 예배를 당분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는 대구 신천지 집단에서 감염자가 무더기로 발생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밀폐된 공간의 다중시절에서 모임과 집회는 코로나19 감염에 치명상이라는 점에서 당분간 이러한 모임과 집회를 자제하여 감염을 차단하자는 취지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지역사회 감염차단을 위해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권고에 따라 내부적으로 지난 2월 23일 주일 이후 교회 모든 모임과 집회, 본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잠정 중지하고 각 가정에서 온라인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도 예배를 중단할 수 없다는 믿음과 신념을 갖고 있다. 코라나19의 감염 확산에 개의치 않고 교회 예배당을 봉쇄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를 드리면서 적극적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지적하기도 한다. 이제 코로나19 사태에서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교회(예배당)를 폐쇄하지 않고 주일 예배를 드렸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는 문제가 있다”며 편 가르기식 분열을 예측 할 수 있다. 이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관계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과거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반복하면 안 될 것이다. 과거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교회)에서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을 판단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절대화하고 절대적으로 고집하여 분쟁의 원인을 제공하면 안 된다.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개념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회론에 대한 개념 이해가 필요하며, 보이는 교회(유형교회)의 예배장소를 절대화 하여 성역화 한다면 성지를 순례해야 구원이 임한다고 믿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특정 장소를 절대화 하거나 성역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거룩함이, 거룩한 예배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사태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한 각가지 논란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전도의 대상자인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배타적인 기독교로 오인하여 전도의 문이 막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의 집단 감염 문제는 개별 교회에만 국한하지 않고 지역주민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이런 이웃을 배려해야하며, 교회는 오히려 최전선에서 코로나19 감염병과 싸우고 있는 관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적극 협력해야 한다. 이렇게 한다고 하여 교회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이번 기회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노출과 자기반성을 통해 회개하는 그런 시간을 가지는 것이 도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그리고 이웃사랑의 실천에 충실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지를 다시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삼아야 할 것이다. 소재열 목사(Ph.D., 김포기독저녈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