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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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7] 북쪽 이스라엘 왕조의 나답과 바아사의 범죄와 심판본문 - 왕상 15:25-6:7 지난 시간에는 15:1-34절 말씀을 통하여 남쪽 유다의 2대 왕이었던 아비얌과 3대 왕이었던 아사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비얌이나 아사 왕은 구약성경이 구원의 반열로서 받아들여지는 유다 계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인물들이었습니다. 또한 25-34절까지 북왕국 이스라엘 왕조의 나답과 바아사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쓰임 받는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렇게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왕들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은 이미 그들의 조상들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한 시대는 언제나 암흑기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과 자신들의 바벨탑을 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범죄 행위를 그냥 두시지 않고 책망하고 심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설정한 기준에 벗어나면 가차 없이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제시한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본문 15장 25절부터 6:7절까지 말씀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남쪽 유다에 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북쪽 이스라엘의 왕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상황은 다시 북쪽 이스라엘로 갑니다. 역대기상 하에서는 남쪽 유다에 관해서는 기록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하에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병행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1. 나답의 범죄와 심판(15:25-32절) 나답은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아들로서 2대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남쪽 유다에게서 나라를 분열해 갔던 여로보암의 집안이 어떻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따라 완전히 망하게 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의 죄에 관해서 열왕기상 12-14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여로보암의 집안이 미처 2대 만에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첫째 나답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범죄합니다(25-26절). 다같이 본문 25-2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으로 있을 때 남쪽 유다왕은 아사왕이었다고 25절에서 말씀합니다. 남쪽에는 아사가 왕으로 있을 때 북쪽 이스라엘에 나답이 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나답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라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였습니까? ① 그의 아비인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② 그의 아비인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하게 했는데 그것도 그의 아들 나답이 본받았습니다. 좋은 것은 본받지 않고 나쁜 것은 왜 그렇게 잘 본받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를 키워 본 사람은 아실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나쁜 것을 가르친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배우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나쁜 것을 잘 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의 자식이 되어버린 비극입니다. 그 비극에는 언제나 비참한 종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 비극의 종말이 있기 전에 우리는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빨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 죄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과의 원수 된 관계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습니다. 이 관계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화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범죄와 타락의 역사 가운데 오직 구원받은 길은 하나님의 언약의 반열에 있는 남쪽 유다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유다를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남쪽 유다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유다에게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할 때도 그들의 죄 때문에 망하도록 버립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북쪽과 똑같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들의 조상들과 약속해 주신 구원의 언약 때문에 용서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이런 이야기를 위해서 열왕기서가 동원됩니다. 그래서 남쪽과 북쪽 번갈아 가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그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늘 부족하고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를 그 죄악대로 망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았는데도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불순종할 때 우리를 징계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3:15절에서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4:7절에도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 바아사가 모반을 일으켜 나답을 암살하고 대신 왕이 됩니다(27-28절). 2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비교해 보십시오. 남쪽 유다는 쿠데타라는 것이 없습니다. 정확히 유다 왕통이 이어집니다. 왜 이렇게 정확히 이어지느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창세기 49:10절의 예언대로 유다 지파를 통한 혈통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의 반열에서 벗어난 계열입니다. 그래서 정통적인 왕가가 없습니다. 그 시대마다 모반과 쿠데타가 난무할 뿐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의 왕가는 그의 아들 나답에 이르러 끊기고 맙니다. 그것도 바아사라는 모반자에 의해서 암살을 당합니다. 아주 비참한 비극의 역사가 진행될 뿐입니다. 언제나 어두움의 권력가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서 모반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권력을 강탈해서 독재자로 군림합니다. 군림할 때는 한결같이 명분을 가지고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으면서도 아직도 자신들의 죄를 부끄러워하고 회개하기는커녕 당당합니다. 주변의 일부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자들을 보스로 여깁니다. 이것이야말로 26절에서 말씀한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나답이 바아사의 모반에 의해서 암살을 당한 것을 보면 이것도 분명히 여로보암가(家)를 망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나답은 겨우 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이후 그 가정이 완전히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셋째, 말씀대로 나답이 죽게 되므로 그의 아비 여로보암에게 말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집니다(29-31절). 29-31절 말씀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29절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30절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31절 “나답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얼마나 무섭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꼭 이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알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행위는 하나님의 노를 격동케 한 행위입니다. 넷째, 나답의 행적이 그들의 역사책에 기록됩니다(31-32절). 나답의 행적은 그들의 역사책에 기록되므로 그들의 범죄행위와 비극이 기록으로 남게 됩니다. 나라나 각 기관이나 할 것 없이 역사를 기록합니다. 그 역사 기록을 통해서 교훈을 받자는 것입니다. 교회도 교회 역사가 있습니다. 그 역사에는 좋은 기록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역사도 기록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한 번 실수는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져서 후대에까지 전달됩니다. 목회자인 저 자신도 우리 교회 목회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에는 은혜롭게 신앙생활하고 목회자에게 힘을 주었던 분들의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도 기록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에 분쟁을 일으키고 목회자에게 가슴 아프게 했던 기록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에 역사입니다. 바울도 분명히 바울서신에서 그렇게 기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행적이나 모든 흔적이 하나님께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흔적이 어떻게들 기록하고 있습니까? 2. 바아사 범죄와 심판(15:33-6:7절) 나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바아사가 북쪽 이스라엘에 왕이 됩니다. 이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왕국을 혁명으로 이어받습니다. 그는 24년간이나 긴 기간의 통치자로 있었습니다. 바아사 역시 여로보암의 죄악을 그대로 닮습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아사는 일평생 남쪽 유다 아사와의 전쟁상태에 있었습니다. 첫째, 바아사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합니다(33-34절). 다같이 33-34절을 읽으시겠습니다. 33절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사 년 동안 다스리니라.” 34절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북쪽 이스라엘에 바아사가 왕으로 있을 때 남쪽 유다의 왕은 아사였다는 것과 그 아사가 왕이 된지 3년째 되던 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아사가 남쪽 이스라엘을 24년 동안 통치했다는 사실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아사 역시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과 같이 하나님께 악했다고 합니다. 혁명으로 왕이 된 바아사 역시 전임 왕이었던 나답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둘째, 예후 선지자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고 저주합니다(16:1-4절). 하나님께서는 시대 시대마다 암흑기에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보내셔서 훈계하시기도 합니다. 꾸짖기도 합니다. 책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저주를 선언하기도 합니다. 그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은 가차 없이 진노와 저주와 멸망을 선언합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 선언대로 결국 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저주 선언이 결코 공갈 협박이 아닙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습니다. 어떻게 꾸짖습니까? 2-4절을 봅니다. 2절 “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3절 “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4절 “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은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너를 높여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너는 여로보암처럼 내 백성 이스라엘이 죄를 짓도록 했습니다. 그들의 죄 때문에 여호와를 화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아사에게 너와 네 집안을 멸망시키겠다고 합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벌을 내렸던 것처럼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 벌은 네 집안사람 가운데 성에서 죽는 사람은 개들이 그 시체를 먹을 것이고, 들에서 죽는 사람은 새들이 그 시체를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이런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말씀으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회개할 것 있으면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바아사 역시 심판의 예언대로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됩니다(5-7절). 본문 5-7절을 다같이 큰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절 “바아사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절 “바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절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흔적이 기록으로 남고, 바아사는 결국 죽습니다. 그 아들인 엘라가 바아사를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 바아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위가 여호와를 노엽게 했습니다. 결국 그 집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교훈과 적용 구약성경은 계속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어떠한 자들에게 진노를 쏟으시고 어떠한 자들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 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죄와 심판 중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 역사를 위해 심판할 자 심판하시고 구원할 자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 구원과 심판을 이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통해서 약속과 언약을 성취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진노하시는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와 제물을 통해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만나주셨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실 예언이었고 약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진리가 바로 오늘 본문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 유다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하고 받아야 하는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정죄의 어두운 세계로 가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합니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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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6] 남 왕국(유다)의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왕, 북왕국 나답, 바아사의 역사열왕기상 15:1-34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14:1-31절 말씀을 통하여 “여로보암(북 왕국), 르호보암(남 왕국)를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과 남쪽 유다의 르호보암 왕의 범죄에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을 심판하신다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가정을 실제로 심판했습니다. 그 집 아들을 병들게 죽게 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쪽 유다 르호보암 역시 범죄할 때 그들 역시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는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범죄를 지적하고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외치지만 끝내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그 진노는 언제나 회개하고 돌이킬 때 거두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버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영적으로 충만하고 풍성할 때 마귀의 시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4:21절부터 유다 왕조의 부패가 14:24절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15:1-34절 말씀을 통하여 “남 왕국(유다)의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왕, 북 왕국 나답, 바아사의 역사”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남쪽 유다를 어떻게 통치했고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북 왕국 나답과 바아사가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범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남 왕국, 아비얌(아비야) 1. 남 왕국,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아비야)에게 임한 은혜(1-8) 열왕기상하를 이해할 때 본문이 북 왕국(북쪽 이스라엘)인지, 남 왕국(남쪽 유다)인지를 확인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열왕기서는 북 왕국과 남 왕국을 번갈아 가면서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 왕국의 아비얌의 아버지 르호보암 왕은 17년 동안 통치한 다음에 죽습니다.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 유다의 왕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 18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어(1절), 예루살렘에서 3년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아비살롬의 손녀 마아가였습니다(2). 이비얌은 그는 3년밖에 통치하지 않습니다(2절). 아비얌이 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북쪽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아비얌은 아버지가 지은 죄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보고 자랐던지 그 아들 아비얌도 아버지가 지은 죄를 본받았습니다.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진실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 말씀을 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시면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라고 합니다. 3절과 4절 사이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3절에서 아비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그 죄악대로 심판하지 않았다는 것이 4절 말씀입니다. 4절에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비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그를 그 죄악대로 심판하지 않는 것은 이미 그의 조상 다윗에게 약속하신 약속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하 7:12-16절 말씀에서 유다의 조상인 다윗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7:16절을 보시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비록 아비얌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의 조상 다윗과 맺은 약속 때문에 유다의 왕조를 완전히 멸망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비록 아비얌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에게 그 후손들과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 때문에 아비얌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게 됩니다. 이것은 값없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본문 7절에 보시면 “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라고 말씀이 있습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비얌의 아버지인 르호보암 때도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비얌은 북쪽 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역대하 13:19절에 보시면 “아비야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의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들과 여사나와 그 동네들과 에브론과 그 동네들이라”라고 합니다. 여기 ‘아비야’는 ‘아비얌’을 의미합니다. 아비야(아비얌)가 여로보암을 쫓아가서 그 성읍들을 빼앗았으니 곧 벧엘과 그 동네와 여사나와 그 동네와 에브론과 그 동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얌은 이 전쟁에서 40만의 군대로 그 갑절이나 되는 80만의 여로보암 군대를 물리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깨끗하고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없다고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합니다. 문제는 죄를 범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죄를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큰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차피 모든 인류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진노의 백성들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죄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진노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범죄 가운데서라도 용서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아비얌이 죄를 범했을 때 그의 조상 다윗과 맺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죄를 범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약속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저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36절에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남 왕국, 아사 왕 2. 아비얌(아비야) 의 아들 아사 왕의 성공과 실수(9-15) 본문 9절에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었습니다. 10절에는 “예루살렘에서 사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라고 합니다. 아비얌이 죽게 되자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됩니다. 부왕인 아비얌은 3년 통치하지만, 아사는 무려 41년간 남쪽 유다를 다스립니다. 아사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우상을 제거합니다. 그는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11),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라고 합니다(12). 남색(男色)과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13절에 보면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라고 합니다. 그 모친 ‘마아가’이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했습니다. 남색이라는 것은 당시 이방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제사를 지내는 남자 창기들이었습니다. 푸른 나무숲 아래 산당(14:23)에는 언제나 남자, 여자 창기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볼 것 같으면 남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관계를 맺을 때 그들의 신은 땅에 풍년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당에다 아예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남자 창기를 두었는데 이런 자들을 남색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이런 이방 종교의 풍습에 젖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왕위에 오르자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고 제거했습니다. 아사 왕은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이런 이방 풍습과 그들의 모든 제단과 산당을 철저히 제거하는 듯하였으나 전부를 하지 않고 남겨둔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고 했습니다(14절). 이같은 아사 왕의 개혁 정책은 역대하에도 자세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2-6절에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고 또 유다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애매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은지라 그가 견고한 성읍들을 유다에 건축하니라”라고 합니다. 이같은 개혁 정책의 결과 하나님께서 “나라가 그 앞에서 평안함을 누리니라 여호와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셨으므로 그 땅이 평안하여 여러 해 싸움이 없는지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 평안을 누리려면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싫어하신 것을 나도 싫어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을 우리도 기뻐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행복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들의 보통 약속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유다 자손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종들을 세우시고 그 종들을 훈련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만약에 그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게 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아사 왕이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북 왕국과 남 왕국의 전쟁 3. 북쪽 이스라엘 바아사 왕과의 전쟁에서 아사 왕의 실수(16-23) 본문 16절에 “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17절에는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라고 합니다. 유다 왕 아사가 41년 동안 통치하면서 두 번의 전쟁을 하게 됩니다. 첫 번째 전쟁은 역대하14:9-15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애굽 및 구스(에디오피아)와의 전쟁이었습니다. 구스의 세라의 군대는 군사가 100만이요, 병거가 300승이었습니다. 아사 왕의 군대 58만과 비교하면 어림없는 군사였습니다. 그때 아사 왕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대하 14:11)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구스 세라의 군대와 싸워 크게 승리한 아사 왕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찾는데 믿음이 식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풍성할 때 늘 우리들의 믿음이 식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아사 왕의 두 번째 전쟁이 북쪽 이스라엘인 바아사와의 전쟁에서는 그런 믿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전쟁은 본문 열왕기상 15:16절 이후에 잘 기록되고 있습니다. 북쪽 바아사가 남쪽 유다를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하는 바아사는 다메섹의 아람 왕을 의지해서 북쪽 바아사를 치게 됩니다. 아람은 이미 북쪽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사는 사람을 보내어 우리가 더 많은 보물을 줄 터이니 북쪽 이스라엘과 맺은 동맹을 포기하고 우리와 동맹을 맺어서 북쪽 이스라엘을 치는 데 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18-19).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역대하 16장에 보면 그 시대 선지자인 ‘하나니’가 유다 왕조의 아사를 꾸짖습니다. 또한 북쪽 바 아사 왕을 꾸짖는 선지자는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꾸짖었다고 말씀합니다. 역대하 16장에 보면 선지자 하나니가 아사 왕을 꾸짖자 그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맙니다. 사실 하나니가 아사 왕을 책망한 이유는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말은 만약에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쟁에 임했더라면 바아사도 이기고 다메섹도 주관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아사 왕에게 과거 세라와의 전쟁에서 하나님만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와주셨는가를 상기시키면서(대하 16:8-9) 이제 왕이 망령되어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징계하시기를 그의 발에 심한 병에 걸리게 합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찾지 않고 의원을 찾아갔다고 합니다(대하 16:12). 이 말씀은 의원에게 찾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려울 때 사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을 꾸짖고 있습니다. 전쟁에서도 사람을 의지했던 아사 왕이 자신을 병으로 징계할 때도 사람을 의지했습니다. 그런 그가 병이 들어 2년 후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남쪽 유다의 4대 왕인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다고 본문 왕산 15: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우리 자신과 가정에 닥쳐왔을 때 우리들의 마음 상태를 한 번 보십시오.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니면 불신자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사람인가?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을 먼저 찾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말로만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상 끝” 하면 됩니까? 말로만 아니라 그 감사는 순종의 모습으로 그 반응이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순종입니까?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 헌신과 희생은 물질일 수도 있고 나의 달란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투자해서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을 때 교만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아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 분명한 역사의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은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남 왕국, 여호사밧 왕 4. 아사 왕 때에 북 왕국 나답 왕(23-34) 첫째, 남 왕국, 아사 왕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됩니다(24). 본문 24절에 “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 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23절에 보면 “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그가 행한 모든 일과 성읍을 건축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41년 동안 남쪽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그 역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됩니다. 그가 남쪽 유다 왕이 될 때 북쪽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었습니다. 둘째, 북 왕국,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됩니다(25-26). 본문 25절에 보면 유다의 아사 왕 2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나답은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라고 합니다(26). 나답이 자기 아버지처럼 여호와께 범죄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나답은 여로보암의 아들입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무서움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집니다. 이미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그의 아들인 르호보암 때에 나라와 분열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는 솔로몬 왕에 대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열로 이어지는데 그 분열이 여로보암의 범죄로 시작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여로보암의 범죄로 하나님의 예언에 따라 나라가 분열되고 그의 가정이 멸절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국의 왕들이 비록 죄를 범했지만, 은혜를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는 이미 다윗과 약속한 언약 때문입니다. 이 약속과 언약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때문에 남쪽 유다에게는 긍휼을 베푸시지만, 북쪽 이스라엘에는 그들의 범죄로 망하게 하는 심판이 임합니다. 셋째, 북 왕국, 나답을 죽이고 바아사가 왕이 됩니다(27-28). 본문 27절에 “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라고 합니다. 잇사갈 지파 사람인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음모를 꾸며 자기 군대와 함께 블레셋 땅의 깁브돈성을 포위하고 있던 ‘나답’을 쳐죽입니다. 28절에 “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라고 합니다. 유다의 아사 왕 3년에 바아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여로보암을 심판하시겠는 약속이 바아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29-34). 29절에는 바아사는 왕이 된 즉시 여로보암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였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실로 사람 예언자 아히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인 나답 왕을 죽이고 바아사가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바아사는 자신의 왕권을 위해 나답과 여로보암의 일족을 멸절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약속하신 대로 쿠데타로 집권한 바아사를 통해 여로보암의 일족을 심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열왕기상 14:6, 11절에서 약속하신 심판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악한 바아사 왕을 통해 여로보암 왕조의 가문을 멸절시킨 것입니다. 이 말씀이 본문 29절에 기록됩니다. “왕이 될 때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여로보암 가문이 멸절된 이유는 30절에 기록됩니다. “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라고 합니다.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죄의 길로 인도하여 여호와를 노하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나답이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책에 기록되었습니다(31). 32절에 보면 “아사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33절에 보면 유다의 아사 왕 3년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디르사에서 24년을 통치하였습니다. 34절에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정권의 정통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를 보면 다윗의 후손으로 계속 그 정통성이 이어집니다. 참으로 신기한 역사 기록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아들을 약속해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구약 성경의 역사는 창세기에서 약속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유다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를 통해 솔로몬, 르호보암, 아사 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은 여로보암과 그의 아들 나답으로 이어집니다. 여로보암은 유다 자손이 아니므로 그의 정통성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인 나답은 바아사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바아사가 나답의 처형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됩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 긍휼이 임하는 곳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곳입니다. 교훈과 적용 열왕기서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병행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왕기서를 읽으실 때 내가 읽고 있는 본문이 남쪽 유다인가, 북쪽 이스라엘인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남쪽과 북쪽을 병행해서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중심은 남쪽 유다에게 있습니다. 남쪽 유다가 구약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 구원의 줄기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남쪽 유다에게 경고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면 남쪽 유다 너희들도 북쪽과 똑같은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역시 망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유다를 통해서 이루실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열왕기서 15:1-24절까지 남쪽 유다의 2대, 3대 왕이었던 아비얌과 아사 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들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구원의 줄기와 역사는 신약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생명이 되시며 희망과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은 문제의 응답이십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이분을 믿고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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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5] 여로보암(북 왕국), 르호보암(남 왕국을 심판하신 하나님열왕기상 14:1-31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13:1-34절 말씀을 통하여 “불순종한 유다의 하나님 사람을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유다의 하나님 사람의 심판과 동시에 여호보암의 범죄에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하나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북 왕국의 늙은 선지자가 거짓말로 남쪽 유대의 하나님 사람을 속였습니다. 유다의 하나님의 사람은 그 거짓에 속아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북 왕국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짓말로 불순종하게 했는데 속이는 늙은 선지자는 그대로 두고 속임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은 심판하였습니다. 그 심판은 시체로 변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여로보암의 우상숭배에 대해 즉석에서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심판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열왕기상 14:1-31절 말씀을 통하여 “북 왕국 여로보암, 남 왕국 르호보암의 범죄에 심판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4장에 와서는 구체적으로 여로보암의 가정의 범죄와 그 가정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는 자기 가정이 복을 받은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결국 복이 아니라 하나님 심판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을 생각하면서도 그 심판 속에서도 그의 자녀들에게 길이 인내하심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초청하고 계신 하나님을 생각지 않으려고 합니다. 14장에서는 북쪽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쪽 유다의 왕인 르호보암도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심판을 받게 되는 내용입니다. 북 왕국 왕 1. 북쪽 이스라엘 여로보암의 범죄와 그 가정의 심판(1-20절) 우리가 살펴보고자 한 본문 14장에 와서는 여로보암의 가정의 실수에 대한 범죄가 기록됩니다. 그 범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게 불순종하고 죄를 범한 사람과 그 가정에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죄인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준엄한 선언입니다. 그 죄에서 회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처단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구체적으로 여로보암의 가정에 대한 범죄와 그 심판에 관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속이고) 선지자 아히야에게 병든 자신의 아들 장래에 관해서 묻습니다(1-5절).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라고 합니다. 이미 13장에서 우리는 여로보암의 범죄와 그 심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때에 여로보암의 집안에 우환이 닥쳐왔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비야가 병이 듭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약속인 언약을 거부한 여로보암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에 “여로보암이 자기 아내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일어나 변장하여 사람들이 그대가 여로보암의 아내임을 알지 못 하게 하고 실로로 가라 거기 선지자 아히야가 있나니 그는 이전에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니라.”라고 합니다. 아버지인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내 아내임을 숨기고 변장하여 선지자 아히야에게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 선지자는 “내가 이 백성의 왕이 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3절에 여로보암 왕이 아내에게 그 선지자에게 선물을 가지고 자서 아들의 병에 관해 물어보고 오라고 합니다. 4절에는 그의 아내가 선지자에게 찾아갑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에게 말씀이 임합니다. 5절에 기록됩니다.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자기 아들이 병들었으므로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러이러하게 대답하라 그가 들어올 때 다른 사람인 체함이니라.”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죄는 죄를 낳는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한 진리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에게 경고해 줍니다. 그 죄는 사망을 가져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라고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욕심과 정권욕은 언약의 반열에서 이탈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있는 관계 속에서 상관없는 상황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여로보암 왕이 하는 일들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범죄 행위에 대한 심판은 그 가정이 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입니다. 이미 13:14절에서 그 가정의 멸망된다고 합니다. 이제 그 가정이 멸망한다는 것은 그 가정의 대를 잇지 못하게 그 집 아들을 제거합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병으로 인하여 죽음이 온다는 것은 최초 인간 아담이 불순종하여 오는 하나님의 심판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공통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오는 각종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병이 왔다는 것은 우리를 훈련하기 위해서 오는 것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는 병이 있기도 하고 또한 우리들의 죄 때문에 징계 차원에서 병이 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아비야가 병들었다는 것은 그 가정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같은 병에서 고침을 받으려면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에게 변장해서 선지자에게 가서 병든 자기 아들의 장래에 관해서 물어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를 속이는 행위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런 여로보암의 가증한 행위를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아내가 선지자에게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같은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찾아오게 될 것을 선지자에게 일러줍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의 아들에 관해서 선지자에게 장차 “어떻게 될 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에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고 그 잘못에 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원인 분석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인 분석은 하지 않고 그 결과만을 놓고 아우성칩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먼저가 아니라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아히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멸망을 예고합니다(6-16절).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병든 그 아들의 장래를 물으러 온다는 정보를 미리 알려 줍니다. 기다리고 있던 선지자는 여로보암의 아내가 도착하자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6절) 고 책망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문으로 들어올 때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아내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냐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을 네게 전하리니.” 선지자는 4절에서 “아히야는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라”라는 말씀대로 자신에게 찾아온 여로보암 왕의 아내인 줄을 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알려 줍니다. 선지자는 책망합니다. 책망의 내용이 7절에서부터 16절에 기록됩니다. 이 책망의 내용을 요약하면, 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②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③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④ 그러므로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아들을 죽이는 예언을 합니다. 계속해서 16절은 충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버리시리니 이는 그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니라.” 여로보암왕은 자신이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왕은 그 백성에게도 범죄하게 합니다. 백성이 왕을 볼 때 배우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들 뿐입니다. 이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약속대로 심판이 임합니다. 셋째, 왕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자 병든 아이가 죽습니다(17-18절). 본문 17절에 “여로보암의 아내가 일어나 디르사로 돌아가서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그 아이가 죽은지라.”라고 합니다. 왕의 아내가 자기 집 문 안으로 들어사자 마자 그 아들은 즉시 죽고 맙니다. 18절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합니다. 18절에 “온 이스라엘이 그를 장사하고 그를 위하여 슬퍼하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선지자의 예언대로 여로보암의 집을 심판합니다. 그 심판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그의 병든 아들을 죽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내가 집에 돌아오자 그 집 아들이 죽습니다. 어머니가 집 문지방을 건너는 순간에 그 집 아들은 죽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 집에 떨어졌습니다. 넷째, 여로보암 왕이 22년 동안 통치한 후 죽고 나답이 왕이 됩니다(19-20절). 본문 19절에 “여로보암의 그 남은 행적 곧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와 어떻게 다스렸는지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라고 합니다. 20절에는 “여로보암이 왕이 된 지 이십이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들 나답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결국 22년 동안 통치하고 나서 죽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죽는 법인데 왜 그렇게 하나님께 교만한지 모르겠습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예배드린 분 가운데 50년 후에도 이 교회에 앉아 있을 분이 계실 것 같습니까? 50년이 아니라 30년 후에 과연 몇 분이 살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기회 주실 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 왕국의 범죄 2. 남쪽 유다 르호보암의 범죄와 심판(21-31절)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줄기, 즉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언약의 계열은 바로 유다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부터 내려온 이 유다 자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펼치신다는 것이 구약 성경의 맥(脈)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이 유다 자손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유다 자손에게서 벗어난 자들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난 것이 됩니다.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은 유다에게서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은 심판합니다. 이제 14장 후반부에서는 남쪽 유다 이야기입니다. 첫째, 남쪽 유다와 르호보암 왕의 범죄(21-24절) 본문 21절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라고 합니다. 북쪽 여로보암왕의 이야기를 끝내고 다시 남쪽 유다 왕의 이야기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남쪽 유다 왕은 르호보암입니다. 그 로호보암이 41세에 왕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언약하신 유다가 그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합니다. 그 르호보암 왕을 비롯한 유다 나라가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본문 22절에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어서 23절에서도 “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라고 합니다. 그의 범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왕도 범죄하고 그 땅에 많은 백성들도 죄를 범합니다.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는 그들의 죄의 목록이 23-24절에 기록됩니다. 23절에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24절에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구체적인 범죄 행위는 ① 우상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② 동성연애입니다. ③ 심판받은 자들의 못된 짓을 본받아 행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는 잘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 라고 생각 해 본 일이 있습니까? 이런 경험을 우리에게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픔 경험, 실패의 경험, 마귀로부터 시험받은 경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징계의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멸망을 받아도 좋다는 잔인한 말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자존심과 명예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싸웠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런 범죄 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둘째, 애굽왕 시삭이 유다를 쳐들어 와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을 강탈해 갑니다(25-28절). 본문 25절에 “르호보암 왕 제오 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라고 합니다. 26절에서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라고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범죄하여 언약 밖의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의 죄값으로 심판으로 받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만큼은 하나님을 잘 믿고 그 하나님을 떠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그들도” 범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합니다. 그 유다를 징계하는데 어떻게 징계하느냐면 애굽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그 애굽이 쳐들어와서 성전과 왕궁의 모든 보물을 강탈해 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입니다.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를 모조리 빼앗겼습니다. 27절에 르호보암왕은 대신 놋방패를 만들어 궁중 경비병들에게 주었는데 왕이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그들은 방패를 가지고 따라갔다가 다시 경비실로 가져왔습니다. 셋째, 르호보암와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었고 결국 로호보암은 죽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됩니다(29-31절). 29절 “르호보암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어서 30절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라고 합니다. 결국 31절에 보면 “르호보암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장사 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열왕기상 14장은 왕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전쟁이나 왕들의 통치 업적을 기록하기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이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기 목적도 아니요, 그렇다고 왕들의 자서전적인 통치의 모범과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도 아닙니다. 이것은 14:19절과 29절 말씀을 통해서도 알게 됩니다. 그런 그들의 자세한 역사는 당시 자신들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왕들의 전기를 알려 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초점은 오직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고 계신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중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이전 상태에 있는 인간의 참모습은 결국 죄로 똘똘 뭉쳐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니다. 그 심판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 구원을 받으려면 죄를 범한 구약의 성도들은 제사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제사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는다는 말은 신약 적으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교훈과 적용 열왕기서 14장은 남 왕국인 유다의 르호보암 왕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의 범죄를 언급하면서 그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합니다. 남북왕조가 똑같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그러함에도 구약의 역사는 남쪽 유다 왕국을 통하여 계속 이어집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람들을 세워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탱해 갑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은 언약 밖의 민족으로 심판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속에서도 남쪽 유다 왕국을 통해 이어지면서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위해 구약 분열 왕국 속에서 비록 범죄 중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구약의 구원 역사를 통해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로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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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4] 불순종한 유다의 선지자를 심판하신 하나님왕상 13:1-34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12:1-33절 말씀을 통하여 “르호보암의 부패와 여로보암의 반역”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북왕국으로 분열해 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미 솔로몬 왕의 범죄로 인하여 그의 아들 대에 나라가 분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약속이 열왕기상 12장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르호보암 왕의 악행 정치와 여로보암의 반란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한 형태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결과로 나타난 악행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2장을 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함이 부패하여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남쪽은 르호보함, 북쪽은 여로보암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분열될 때는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분열됨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약점과 한계입니다. 잘못된 자신들의 행동에 나름대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판단하십니다. 이번에는 본문 열왕기상 13:1-14절 말씀을 통하여 “불순종한 유다의 하나님 사람을 심판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3장에서 하나님은 어떠한 분으로 계시되고 있습니까? 즉 하나님은 어떠한 분으로 보여주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열왕기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정치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기록됩니다(왕상1-11장). 문제는 솔로몬 왕 이후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분열 왕국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분열 왕국 시대에 두 나라가 모두 부패합니다(왕산 12~22장).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북쪽 이스라엘을 패망하게 합니다(열왕기하1-17장). 또한 남쪽 유다도 패망하게 됩니다(왕상18-25장). 이런 이야기가 열왕기서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런 열왕기서를 통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께 범죄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공의로 심판하시며 그 심판 속에서도 어떤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한 나라가 패망하는 모습 속에서 진리의 교훈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 교훈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구약의 역사 가운데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2:24절까지는 남쪽 르호보함에 관해서 기록됩니다. 그러나 12:25부터 13장과 14장은 북쪽으로 분열해 가는 여로보암의 부패와 범죄에 관해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 13장 말씀을 통하여 분열 왕국 시대에 북쪽으로 분열해 가는데 주동자였던 여로보암의 부패와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사람의 책망 1.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을 책망하고 징조를 보입니다(1-10절). 1-10절 말씀은 여로보암이 북쪽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장소인 남쪽 유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지도 않는 곳에서 분향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이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그를 책망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어 심판의 징조를 보여주십니다(1-3). 본문 1절에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유다에서 벧엘로 갔습니다. 그때 마침 여호보암은 단 곁에 서서 분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람”(이쉬 하엘로힘)이란 ‘선지자’(나비)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사역을 강조하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남쪽 유다왕국의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키 위해 벧엘로 갔습니다. 2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단 곁에서 분향하고 있는 여로보암을 향하여 외칩니다.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요시야라는 아이가 다윗의 집안에서 태어날 것을 말씀합니다. 그 아기가 태어나 여기서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을 네 위에 제물로 바칠 것이며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태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은 먼 훗날 무려 333년 후에 다윗 왕조에서 출현할 한 왕을 통해 심판하겠다고 합니다. 그 왕의 이름까지(요시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를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3절에 보면 “그 날에 그가 징조를 들어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징조라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하매”라고 합니다. 여기 “그 날”이란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는 그날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징조를 보입니다. 징조란 “미리 보여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징조는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란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기보다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자신의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正)을 미리 알리는 조짐으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왕하 23:15-20).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책망할 때 그것을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내가 독약을 음료수인 줄 알고 마시려고 할 때 옆에서 누가 그것을 책망할 때 그것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내가 그것을 손으로 집으려고 할 때 목사님이 내 손을 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기분 나빠하실 겁니까?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방치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둘째,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을 해치려고 하자 그의 팔이 마비됩니다(4-5). 본문 4절에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제단에서 손을 펴며 그를 잡으라 하더라 그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사람의 심판을 예언하자 손을 펴서 “그를 잡으라”라고 하자 그의 손이 마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잡으라고 명령하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시 여로보암의 팔이 펴진 채로 마비되었습니다. 이어서 5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말한 대로 갑자기 단이 갈라지고 재가 단에서 쏟아져 내렸습니다. 범죄하고 있는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고 경고할 때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 책망한다고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말씀으로 권면하고 책망하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이 사탄적 발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셋째, 여호보암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움을 호소합니다(6). 본문 6절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같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대로 곧바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철회하고 하나님의 사람에게 간청합니다.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여로보암 왕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내 손이 다시 성하게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같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호의를 거절합니다(7-8). 7절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자신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가서 잠시 쉬었다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선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기적인 마치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을 치료해 준 것에 관해 사례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은 여호보암 왕에게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떡은 물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겠다고 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사람을 집으로의 초대와 식사를 나누는 것은 우호 및 친교의 표시였습니다(창 13:1-8). 하나님의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여로보암 왕과 가까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가 제공하는 그 어떤 음식도 취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여호보암 왕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할 경우 그와 함께 망할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9-10). 9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람의 이러한 결단은 곧 하나님께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빵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오던 길로는 돌아가지도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10절에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던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무수히 많은 범죄한 백성들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또한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먼 훗날 여로보암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거짓말 2. 벧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속여 데려옵니다(11-19절). 유다에서(남 왕국) 온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과 긍휼을 전한 다음에 돌아갔습니다. 1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첫째, 북왕국 한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뒤쫓아 가 만납니다(11-14). 본문 11절에 보면 북왕국에 “한 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 아들들이 남왕국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여로보암에게 행한 일을 보고합니다. 듣고 있는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돌아간 그 길을 뒤쫓아가서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벧엘로 데려오려고 합니다. 본문 12절에서는 늙은 선지자가 어느 길로 되돌아갔느냐고 묻자 하나님의 사람이 되돌아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13-14절을 보면 그 늙은 선지자는 나귀를 타고 유다에서 온 예언자를 뒤쫓아 갔습니다. 그러자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14절에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둘째, 유다의 하나님의 사람은 북왕국의 늙은 선지자가 제공한 음식을 거절합니다(15-17).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 확인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합니다. 15절에 보면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북왕국 늙은 선지자에게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16절에 기록됩니다.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러한 결연한 의지는 유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제공한 그 어떤 음식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람은 굳은 결심과 의지를 보입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던 길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셋째, 유다의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에 속아 넘어갑니다(18-19). 본문 18절에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라고 합니다. 북왕국 늙은 선지자는 자신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천사가 나에게 당신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접대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본문 하반절에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라고 합니다. 문제는 19절에서 유다의 하나님의 사람이 북왕국의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19절에 보면 “이에 그 사람이 그와 함께 돌아가서 그의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늙은 선지자를 따라가서 그곳에서 식사 대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여로보암과 함께하지 말라고 했으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감언이설에 넘어갑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보냄을 받은 선지자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습니다. 딤후 3:13-14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합니다. 우리가 악에 미혹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핑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무식과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듣고 공부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속은 자들 3. 속아서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이 저주를 받습니다(20-32). 거짓말로 범죄했던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외치게 합니다. 이제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무섭습니다. 첫째,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20-22). 본문 20절에 “그들이 상 앞에 앉아 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니”라고 합니다. 식사 도중에 여호와께서 그 늙은 예언자를 통해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씀합니다. 21절에 유다의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온 북왕국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가짓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하나님의 사람에게 “너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 22절에는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시체로 변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22절에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죽게 되어 시체로 변할 것이며, 그의 조상의 묘실에 장사 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싸늘한 시체로 변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은 돌아가는 길에 사자가 물어 죽입니다(23-28). 본문 23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나귀를 타고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에서 사자가 그를 물어 죽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가 길에 버려졌습니다(24). 25절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를 보고 북왕국의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하나님의 사람이 죽은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26절에 보니 거짓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죽게 한 늙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라고 말합니다. 그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보고 확인하기 위해 현장으로 갑니다(27). 그리고 그 시체를 목격하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28). 사자가 그 시체를 먹지 않았습니다. 셋째,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가져가 장사를 지내 줍니다(29-32). 29절에 보면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자기 성읍으로 가져가서 “슬피 울며 장사”를 했습니다. 30절에서는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늙은 선지자는 그의 아들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시체를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라고 합니다(31). 본문 32절에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라고 합니다. 한 선지자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이 북쪽으로 분열되어 범죄한 그들의 행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범죄 4. 여전히 여로보암은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33-34). 본문 33절에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34절에는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라고 합니다. 한 선지자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임한 사건이 있는 후에도 여로보암은 악을 버리지 못하고 제사장으로 지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산당 제사장으로 임명하는 불법을 범했습니다. 그래서 이 죄 때문에 여로보암의 집안은 완전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오늘 우리는 구약 열왕기서 13장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또한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열왕기서 13장에서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까? 여기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소개받아야 하고 어떤 하나님으로 믿어야 합니까?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커다란 범죄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불순종 한 자들에게는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순종한 자들에게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을 소개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불순종의 범죄 때문에 죽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형벌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말 그대로 어두움에 속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 가운데 구원하셨습니다. 어떻게 구원하시고 빛으로 인도하셨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한 자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속고 있는 자들은 아닙니까? 좋은 시절 세상과 함께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보류여야 합니다. 철저한 말씀의 기준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방심하면 안 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여로보암은 남쪽 유다를 떠났습니다. 구약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약속은 남쪽 유다에게 있습니다. 그 유다왕국을 떠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그 유다를 통하여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다를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이들이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그 남쪽 유다에게서 떠나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약 밖의 계열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도 그는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안 됩니다. 만약에 떠난다면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포기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인하여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붙드실 것입니다. 인도하실 것입니다. 보호하실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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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3] 르호보암의 부패와 여로보암의 반역본문 / 왕상 12:1-33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11:1-43절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의 배반과 진노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솔로몬은 부왕인 다윗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솔로몬 역시 40년 동안 통치하였습니다. 통치 초반에는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여 곁길로 갔습니다. 솔로몬 왕은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적이며, 하나님의 적이었던 이방 나라의 여인들을 사랑하여 후궁으로, 첩으로 맞이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여인들이 가지고 온 그들의 가지고 온 신을 섬겨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했습니다. 이방 나라를 들어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솔로몬의 아들 대에 나라가 분열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형적인 심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분열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열왕기상 12:1-33절 말씀을 통하여 분열 왕국으로 가는 구체적인 모습인 “르호보암의 부패와 여로보암의 반역”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백성의 요구 1. 르호보암 왕에게 자유를 요구한 백성들(1-5) 첫째,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이 됩니다(1). 본문 1절에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라고 합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습니다. 세겜에서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고자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르호보암(Rehoboam)은 암몬 여인 나아마의 소생으로 솔로몬의 독자였습니다(14:21,31, 대하 12:13). 따라서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11:43). 르호보암이 즉위할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으며, 17년간 통치하였습니다(14:21). 둘째, 분열왕국을 위한 여로보암이 애굽에서 돌아옵니다(2-3). 2절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 왕 때 그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했습니다. 이스라엘 무리들이 애굽에 사람을 보내어 여로보암을 불러옵니다. 3절에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남쪽에 있는 유다 지파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북쪽 지방에 있는 10지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10지파의 유력한 지파, 즉 실권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여로보암은 그 실권 지파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했습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솔로몬이 죽자 다시 돌아왔습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르호보함 왕에게 하소연합니다. 셋째,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르호보암 왕에게 요구합니다(4-5). 여기서 말한 이스라엘 온 회중이란 북쪽 지역에 있는 10지파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왕에게 요구한 내용은 4절에 기록됩니다. 4절에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르호보암 왕에게 왕의 아버지인 솔로몬 왕이 자신들을 혹사했다고 하소연합니다. 자신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짐을 가볍게 하여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모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5절에서 즉답을 피하고 3일 후에 다시 오라고 합니다. 2. 선친(솔로몬 왕)의 원로들에게 자문한 르호보암(6-11). 첫째, 르호보암이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6). 6절에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라고 자문을 구합니다. 둘째, 원로들은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자문합니다(7). 그때 원로들은 7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성실히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신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사울처럼 악한 자로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자로 쓰임을 받은 자입니다. 왕이 백성을 섬긴다는 것은 그 백성은 자신의 백성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로호보암이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 언약에 충실하려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섬겨야 합니다. 원로들은 르호보암에서 바로 이처럼 섬기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이라고 합니다. 여기 ‘말’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바르’입니다. 이는 말, 일, 사건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좋은 말’이란 선하고 즐거운 말, 백성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이든, 장로이든 교인들을 섬기면 됩니다. 군림하는 자세는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위한 모든 자신의 언어, 행동 등을 통해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원로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왕이 백성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할 때에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라고 합니다. 즉 이렇게 될 때 백성은 왕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 그러나 르호보암 왕은 원로들의 자문을 거부합니다(8). 8절에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라고 합니다. 백성들을 섬기라는 원로들의 자문을 거부하고 어린 자신의 참모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9절에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라고 합니다. 넷째, 어린 자신의 참모들의 자문 내용은 무엇입니까?(10-11) 본문 10절에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라고 합니다. 젊은 참모들은 르호보암에게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라고 합니다. 이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새끼 손가락과 가장 굵은 부분인 허리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르호보암의 능력에 대해 과장된 찬사를 보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르호보암이 부친 솔로몬보다 훨씬 능력이 많다는 말로 왕에게 아첨하는 말입니다. 원로들의 충성스러운 자문을 거부하고 자신 곁에서 권력의 맛을 아는 참모들인 소인배들의 조언은 아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젊은 왕의 혈기를 충동질하기에 적절했습니다. 인간의 본능과 본성을 자극하는 말로 아첨하는 말입니다. 11절에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 것을 공포하고 합니다. 아버지는 채찍으로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할 것이라고 공포정치를 하라고 합니다. 언약 백성의 왕은 백성들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섬기는 자의 모습이 곧 왕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왕입니다. 3. 르호보암의 공포정치(12-15) 백성들의 멍에가 더욱 무거워집니다. 본문 12절에 3일 후에 답변을 주겠다는 왕의 약속에 따라 여로보암과 백성들이 답변을 듣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13절에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라고 합니다. 여기 “포학한 말”이란 “난폭한 말”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고집이 세다’는 뜻을 지닌 ‘카솨’에서 온 말입니다. 이 ‘카솨’는 본래 무거운 멍에에 짓눌린 소를 참기 어려운 정도로 혹사하는 농경의 한 장면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자 중에 이런 고집이 센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나온 것은 난폭한 말과 행동입니다. 이는 과거 애굽의 노예 생활시 바로가 히브리 노예에 대해 그렇게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 14절은 르호보암은 자신의 이런 참모들이 조언해 준 대로 그대로 백성들에게 공포정치로 대응합니다. 14절에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르호보암의 행동과 그의 태도에 대한 평가가 15절에 기록됩니다.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실로 사람 아히야는 솔로몬 때부터 르호보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활약했던 에브라임 지파 출신의 선지자입니다. 14절에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고 합니다. 원로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복들의 말만을 듣고 백성들을 더욱 고통 가운데 빠뜨립니다. 이런 모습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기 마련입니다. 4.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의 반역(16-20절)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16절에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다윗과 그 집안을 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새의 아들에게서 무엇을 얻겠느냐며 르호보암에게 네 집안이나 잘 다스리라고 비아냥합니다. 이런 말을 하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17절에 보면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 왕이 되었더라”고 합니다. 18절에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이제 북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10지파 중심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을 대항하였습니다. 본문 19절에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해 갔던 그들은 남쪽 유다를 배반하여 분열 왕국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주전 722년쯤에 아수르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 완전히 나라가 멸망을 당했습니다. 20절에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북쪽 지역의 10 지파 중심의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남쪽의 다윗의 자손인 르호보암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5. 유다가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나 하나님이 저지시킴(21-24) 분열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유다가 싸우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서 저지시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라고 합니다.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18만 명의 정예병을 소집하였습니다. 이 군사로 전쟁을 일으켜 이스라엘 북쪽 지파를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22절에 보니 하나님의 사람인 스마야를 통하여 르호보암과 그리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4절에 기록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하나님의 사람인 스마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24절에서 형제 이스라엘 사람들과 싸우러 가지 말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 일은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라고 합니다. 이는 북쪽 이스라엘의 반란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말씀한 내용입니다. 군사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6. 여로보암의 우상숭배(25-33절) 여로보암은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쓰임을 받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임을 받은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위해 쓰임을 받은 자인지를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합니다. 나에게 악하게 쓰임 받는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지 않나 살펴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지역의 10지파를 선동하여 남쪽 유다 지파 소속인 르호보암 왕을 거부하는 선동을 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간 지대에 세겜성을 건축하여 자신들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는 “브누엘성을 건축”하기도 했습니다. 본문 26절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본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이 이야기는 여로보암이 생각하기를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다윗의 집안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반란을 일으켜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르호보암에게는 심판하여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런 반란을 일으켜 완전히 망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후에 역사는 이런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여로보암은 27절에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라고 합니다. 북쪽 지역에 있는 10 지파 백성들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면 그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을 따르고 동시에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놓은 해결책은 28절에 보면 북쪽 지역에 금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백성들에게 지금부터 제사를 드리려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금송아지 두 마리를 가리켜 애굽에서 구출한 신이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28절에 기록되는데 28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이 두 금송아지 신을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29)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을 백성들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우상을 세워 백성들에게 그 우상을 섬기게 했습니다. 지도자가 백성들을 다 망하는 길로 가게 합니다. 물론 이는 그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심판 결과였습니다. 백성들이 심판받을 지도자를 따르게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실 지도자를 따를 것이냐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까지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 가까운 벧엘과 단에 각각 세워 편리한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이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이는 그들의 범죄행위에 해당합니다(30).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을 숭배하게 한 여로보암은 31절에 보니 산당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점점 수렁에 빠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배반하게 합니다. 애굽에 피난 가서 못된 것만 배우고 왔습니다. 또한 32절에 보니 여로보암은 8월 15일을 유다의 명절과 비슷한 명절로 제정하고 벧엘에서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분향했습니다. 그리고 산당에서 일할 제사장들을 정식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악한 권력을 피해 분열해 나갔던 권력도 악해집니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분열해 나갔던 여로보암은 우상숭배를 합니다. 28절에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라고 합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백성들의 종교적인 욕구를 채워줍니다. 우상을 만들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지 않고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현혹해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합니다.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백성이요, 언약 지파였던 유다에게서 벗어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행복하고 일이 더 잘 풀릴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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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2] 솔로몬의 배반과 진노하신 하나님본문 / 왕상 11:1-43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10:1-29절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에게 복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에 대한 명성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올 때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부와 권세, 영화가 대단했습니다.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는 대단했습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의 왕권은 든든히 세워져 갔습니다. 그의 군대는 막강한 군대가 되었습니다. 군수물자를 비롯하여 솔로몬 왕국을 세워가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지혜와 그의 왕권이 강화되고 든든히 세워져 갔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러한 하니님의 은혜는 특별한 어떤 목적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이 목적으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그와 언약을 맺으셔서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솔로몬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열왕기상 11:1-43절까지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의 배반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토록 솔로몬은 부왕인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습니다. 다윗의 언약을 계승한 솔로몬 왕은 그 언약에 따라 하나님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습니다. 강력한 솔로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충성의 시대가 끝나고 배반과 배신의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배반과 배신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합니다. 곁길 1. 솔로몬이 많은 이방 여자들을 좋아하여 곁길로 빠집니다(1-3). 본문 1절에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라고 합니다. 여기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에서 ‘사랑하였으니’라는 히브리어 단어인 ‘아하브’는 이방 여인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진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방 여인에게 집착합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욕망에 의한 성적(性的)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아!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부와 명예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그런 복을 잘 감당하지를 못했습니다. 교만해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솔로몬이 처음 아내로 맞이한 애굽의 바로 딸 외에 많은 후궁과 첩을 거느렸습니다. 이방 여인들을 좋아하고 함께 생활합니다. 본문 2절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그러나’, 솔로몬 왕이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여 후궁이나 첩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이방 신들까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욱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 ‘통혼’이란 단어는 ‘들어오다’, ‘들어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통혼하지 말라는 말은 이방 여인에게 들어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들을 들어오게 하지 못하게 하는 뜻입니다. 본문 3절에는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후궁’에서 히브리어로 ‘후’는 왕비나 귀부인을 의미하고 ‘궁’은 ‘여자’, ‘여성’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후궁이 700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첩은 300명이었습니다. 첩 역시 정식 아내였습니다. 이 많은 이방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감격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로 향했던 나의 마음이 세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처럼 변하게 했고 변질되게 했고 배반하게 되었습니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들이 다 올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에게로 들어올 때 그들이 믿는 신까지 가지고 옵니다. 그 신은 그들의 민족적 신입니다. 이러한 우상을 가지고 들어와 숭배합니다. 그 여인들뿐만 아니라 솔로몬까지 이 일에 동참합니다. 그 여인들은 솔로몬을 유혹했다는 것은 얼마든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7절과 8절에 보면 솔로몬은 그들이 믿는 이방 신들을 위해 산당까지 지었습니다. 이제 서서히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우상을 받아들이는 혼합주의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다. 왕 한 사람의 잘못으로 민족적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방 여인과 우상 2. 솔로몬이 이방 여인인 후궁과 첩들과 함께 우상을 숭배합니다(4-8). 본문 4절에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그 역시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이제 총명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자신의 여인들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모독했습니다. 또한 5절에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다”라고 합니다. 아버지인 다윗과 같은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러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범죄는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이 과연 어떠한 분이시지를 잘 모른 결과입니다. 바른 하나님을 믿었더라면 이런 행동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신지식과 비례합니다. 7절에는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여기 그모스는 모압 족속의 신입니다(민 21:29). 그러한 이방 신을 위해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다”라고 합니다. 또한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다”라고 합니다. 본문 8절에는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에게 분향하고 제사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디윗이 그토록 염려한 일이 솔로몬 말년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무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왕의 권력을 남용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곧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열매들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요 15: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해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3.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9-13). 본문 9절에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패턴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3:5-14, 9:2-9)이나 나타나 분명히 말씀했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본문 10절에 의하면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11절에 기록됩니다.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 이러한 일이 있었고 둘째, 내 언약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셋째,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여기서 ‘빼앗아’라는 단어는 ‘카라’인데 ‘찢다’, ‘쪼개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왕에게 이스라엘의 왕국을 둘로 나누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의 이스라엘이 둘로 분열될 것을 말씀한 내용입니다. 정차 이스라엘이 분열 왕국이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솔로몬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12절에서 이 분열은 그의 아들 때에 일어날 것을 말씀합니다. 12절에 보면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라고 합니다. 이어서 13절에서는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과 분열이 일어나도록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분쟁으로 분열이 일어났다면 이는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습니다. 분쟁의 양측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분열로 인한 심판 중에서도 솔로몬의 아들에게는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주리라”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선택한 도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언약에 근거(삼하 7:13)하여 거룩한 여호와의 이름을 두기 위해 택하신 곳입니다. 이미 창세기 3:15, 49:10절 이하에 약속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 다윗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이어집니다. 이러한 대(代)를 끊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구속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여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배반으로 하나님께 진노의 심판을 받아 하나의 이스라엘이 둘로 분열되지만, 약속의 계열인 솔로몬과 그의 아들 르호보암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계속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보여줍니다. 대적자를 일으킴 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합니다(14-22). 본문 14절에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에돔의 조상은 이스라엘 조상 야곱의 형인 에서입니다(창 36:1). 구약성경에서 에돔은 언약 밖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언제나 대립과 갈등,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특히 에돔 족속은 남왕국 유다의 적(敵)이었습니다. 그러한 에돔의 왕이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셨습니다. 본문 15절에서부터 에돔의 하닷이 다윗 시대에 요압 장군이 에돔의 남자를 다 죽일 때 하닷은 어린아이였습니다. 이때 아닷은 아버지의 신하 몇 사람을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그곳 애굽에서 바로의 도움으로 정착한 후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는 다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22절까지 이어집니다. 동족이 대적이 됨 5. 르손과 에브라임 족속이 대적이 되게 합니다(23-40). 본문 2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서 솔로몬의 적이 되게 하셨습니다. 르손은 자기의 주인인 소바 왕 하닷에셀로부터 도망친 사람입니다. 본문 26절에 “솔로몬의 신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그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스루아이니 과부더라.”라고 합니다. ①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고 ② 에브라임 족속 스레다 사람인 여로보암으로 인한 대적을 일으키십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8절에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청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여로보암은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솔로몬은 이 젊은이가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즉 요셉 가문의 모든 일꾼을 감독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요셉 족속은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를 말합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이었습니다(창 48:5). 이 두 지파는 북쪽의 가장 강한 지파들이기 때문에 ‘요셉 족속’은 곧 북 왕국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 29절에 보면 그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길에 예언자 아히야를 만났습니다. 30절에서는 그 아히야는 입고 있던 새 옷을 찢어 열두 조각으로 나누었습니다. 31절에서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말하기를 열 두조각을 가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솔로몬에게서 그 나라를 빼앗겠다. 그래서 열 지파는 여로보암에게 주겠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예언자를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예언자나 선지자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축복입니다. 요셉은 창세기 49장에 보면 많은 복을 받습니다. 창세기 49:22절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합니다. 이어서 23-24절에서는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여 흉년의 때에 형제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했습니다. 창세기 50:20절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이어서 21절에서는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유다와 그의 자손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약속은 신약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이 창세기 49:10절에서 약속해 주신 내용입니다. 창세기 49:10절에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다와 맺은 약속 때문에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도 그들을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하여 먼저 와 있던 요셉으로 인해 생명이 보존되었습니다. 바로 요셉의 존재 목적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은 버림으로 쓰임을 받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나중에 여로보암이 이끈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완전히 망해서 흩어진 민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바벨론 포로 중에서도 돌아오게 하셔서 성전을 재건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그 후손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본문 35절에서는 “내가 그의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36절에는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12파를 나누어 하나님은 10지파(실제는 9 지파 반)의 실권 지판인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여로보암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게는 유다 지파를 통하여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라고 합니다. 이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한 남쪽 유다왕국을 통하여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솔로몬의 죽음 6. 솔로몬이 죽고 다윗성에 장사 됩니다(41-43). 본문 41절에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그의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는 솔로몬의 실록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합니다. 42절에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 수가 사십 년이라고 합니다. 43절에는 “솔로몬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아버지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도 결국 죽습니다. 그가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왕인 르호보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됩니다. 교훈과 적용 솔로몬의 왕권이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그 언약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합니다.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첩으로 두고 그 첩들로부터 수입해 들어오는 우상이 번지고 확산하자 하나님으로부터 배척을 받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말씀은 파기 내지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분리시켜 유다 지파와 예루살렘을 분리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이 동원됩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을 위해 계속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 구속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본문인 열왕기서 11장에서 약속됐다는 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이 오히려 나에게 심판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올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일편단심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절개와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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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0] 솔로몬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본문 / 왕상 9:1-28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8:1-66절 말씀을 통하여 “성전 낙성식에 임재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전을 완공한 후 하나님께 드리는 낙성식을 행합니다. 새로운 완공한 성전에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이 임재합니다. 그러한 성전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낙성식을 하면서 솔로몬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여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어떤 약속을 맺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약속하시고 언약을 베푸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솔로몬의 기도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번에서는 열왕기상 9장(1-28) 말씀을 통하여 “솔로몬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솔로몬을 위대한 자서전적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 솔로몬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과 맺은 언약을 계승한 내용입니다. 솔로몬에게만 별도로 하신 언약이 아니라 이지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의 연속성입니다. 기도응답과 언약 1. 솔로몬의 기도응답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1-9) 본문 1절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일을 마친 때”라고 합니다. 여기서 “마치다”라는 말은 ’완성하다‘는 의미입니다. 앞으로 솔로몬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을 마쳤다는 말은 성전 건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던 모든 것”이라고 할 때 “원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즐거워하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 성전 건축을 마친 때에 2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라고 말씀합니다. 3:5절에 보면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후 하나님이 꿈을 통해 나타난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다윗에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B.C 971-931년경). 마태복음 1:6절에서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솔로몬을 “다윗은 솔로몬을 낳고”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기록하느냐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지 않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합니다. 밧세바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선지자 나단이 그를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심”)라 칭했습니다(삼하 12:25). 여기 우리야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위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다윗의 범죄로 인해 죄는 우리야가 희생을 당했습니다. 즉 의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밧세바의 이름이 아닌 “우리야의 아내”라고 합니다. 본문 3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째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응답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은혜를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솔로몬 개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6절에서는 이스라엘 전체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에서는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할 때 5절에 보면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6절에서는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7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문 8절과 9절에서 언급한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기도를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솔로몬이 지킬 때 하나님께서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각종 공사 자금 마련 2. 솔로몬의 공사 자금 마련(10~14절) 본문 10절에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이십 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라고 합니다. 성전은 7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왕궁은 13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과 기타 방어를 위한 공사를 많이 했습니다. 많은 국고가 소요되었습니다. 특히 두로의 히람 왕에게서 가져온 각종 재료에 대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두로의 히람은 이스라엘 때문에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공사 대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갈릴리 지방의 성읍 20개를 히람에게 주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닌 점령지를 히람에게 성전 건축시 거액의 받고 넘겨준 것입니다(11절). 그러나 막상 히람은 갈릴리 지방을 돌아보더니 눈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히람은 그 땅 이름을 ‘가불’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쓸모없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히람은 그 땅값을 120달란트를 솔로몬에게 지불했습니다(14절). 각종 공사와 백성의 언성 3. 솔로몬의 방어 공사(15~24절) 본문 15절에 “솔로몬 왕이 역군을 일으킨 까닭은 이러하니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솔로몬의 나라를 위해서 각종 방어 공사를 위해서 필요한 인력을 강제로 충당했습니다. 20년에 걸친 솔로몬의 건축 공사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솔로몬 왕은 옛 가나안 토착민의 자손 등 가나안인 역군들의 수는 15만 명 이상이었습니다(5:15). 솔로몬은 여러 성읍을 건축하였습니다(17~19절). 성을 건축하고 국고성을 건축했습니다. 19절에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였습니다. 국고성(國庫城)은 나라에 필요한 물품들 즉, 군량미 등을 비축하는 장소이다(창 41:35, 출 1:11, 대하 17:12, 32:28). 따라서 이러한 국고성을 건축하여 요새화하였습니다. 본문 23절에 “솔로몬에게 일을 감독하는 우두머리 오백오십 명이 있어 일하는 백성을 다스렸더라”라고 합니다. 550명의 감독은 상급 감독으로서 이스라엘인 250명, 가나안인 30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의 아내를 위하여 새집을 건축하였습니다(24절). 24절에 “바로의 딸이 다윗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각종 공사를 위해 동원된 역군은 그 수효가 대단했습니다. 솔로몬은 점점 백성들의 언성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종 공사에 인력을 강제로 충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나라가 분열되는 아픔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제사 4.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해마다 제사를 드림(25절) 25절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성전 짓는 일을 마치니라.”라고 합니다. 여기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이란 역대하 8:12에 보면 “낭실 앞에 쌓은 여호와의 단”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성전 앞뜰의 ‘번제단’을 가리킵니다. 해마다 세 번씩 드렸습니다. 대하 8:13에 의하면, 이 세 번의 제사는 일 년의 세 절기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습니다. ‘무교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기 위해 드린 절기입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유대 종교력), 어린 양을 제물로 잡는 첫날을 가리킵니다. 반면 무교절은 그다음 7일간을 가리킵니다. 이 절기 전체를 ‘무교절’ 혹은 ‘유월절’로 통칭(通稱)합니다(출 12:1-28). ‘칠칠절’(혹은 맥추절, 출 23:16)은 3대 절기 중 두 번째 절기로서 일종의 수확제이다(레 23:21, 민 28:26, 렘 5:24). 처음 보리 벤 때부터 밀 수확을 끝마치는 7주간이 끝난 다음 날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이 바로 이 날입니다. ‘초막절’(장막절)은 3대 절기 중 세 번째 절기로서 가을 축제입니다(8:2). 이 절기에는 광야에서 유랑하던 40년을 회상하면서 언약 갱신의 의식을 갖습니다(출 23:16, 34:22, 신 16:13, 16). 이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지 않고 고정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며 분향을 했습니다. 솔로몬의 경제 무역 5. 솔로몬의 무역 함대(26~28절) 본문 26절에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라고 합니다. 여기 ‘엘롯’(Eloth, 또는 ‘엘랏’(Elath, 신 2:8)과 ‘에시온게벨’(Ezion. geber)은 주요 항구 도시입니다. 이 두 항구 도시는 전략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였습니다. 그 항구에서 배들을 지었습니다. 27절에 “히람이 자기 종 곧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매”라고 합니다. 역대하 8:18에 의하면, 히람이 솔로몬에게 보낸 것은 사공뿐만 아니라 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28절에 “그들이 오빌에 이르러 거기서 금 사백이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왔더라”라고 합니다. 당시 금 한 달란트(talent)의 무게는 대략 34.3Kg이었고, 그 가치는 장정 1,500명의 노예 값에 해당하였습니다. 솔로몬의 해상 무역은 그가 가진 부의 주요 원천 중 하나였습니다. 해상 무역은 이스라엘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즉 이제까지 지파 중심으로 농경과 목축에 주력하던 이스라엘에 상공업의 물결이 밀려 들어옴으로써 도시 문화가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왕국이 든든히 서져 가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교훈과 적용 여호수아 11: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 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혜를 입지 못하면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맺은 언약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 언약의 계승과 성취를 성전과 여호와의 이름과 결부시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나의 이름을 영원히 거기 두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언약의 말씀에서 이스라엘이 벗어날 때 가차 없이 이 땅에서 제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거룩하다고 하는 이 성전도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많은, 그것도 화려한 업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 된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심장이 기도로 뜨거워져야 할 것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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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9] 성전 낙성식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왕상 7:1-51절 말씀을 통하여 “성전 기구 공사를 완성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드리며 제사를 드리는 그 중요성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동식 텐트를 통한 성막 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정한 장소에서 제사를 드리기보다는 이동식 성막이 머무는 곳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솔로몬 시대에는 이동식 성막이 아닌 한곳에 정착한 고정된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완공된 성전에 재사를 드리는 각종 기구를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완벽한 시설을 완공하고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본문 8장(1-56절)에는 성전을 완공한 후 하나님께 드리는 낙성식을 행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낙성식을 하면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어떤 약속을 맺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약속하시고 언약을 베푸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솔로몬의 기도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언약궤 이전 1. 완공된 성전 지성소로 언약궤를 옮겨옴 (1-11)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위해 매주 중요했습니다. 이 언약궤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들어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이 언약궤와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본문 8:1절에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공사와 내부 시설을 모두 완공한 후 여호와의 법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성전으로 옮기는 작업을 합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와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족장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다. 예루살렘에 소집한 모임은 7월의 초막절이었습니다(2).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다 모이자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성전으로 올라갑니다(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성막과 성막 안의 모든 기구도 성전으로 옮겼다(4). 각자 임무가 있습니다. 법궤는 제사장들이 메고 갑니다. 법궤는 아무나 운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전 안의 각종 기구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가지고 올라갑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솔로몬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 앞에 모여 양과 소를 바쳐 제사를 드렸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다 셀 수가 없었습니다. 6절에 보면 그런 다음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성전 안으로 메어 들여 지성소의 그룹 천사 날개 아래 두었습니다. 언약궤가 다윗성의 시온 산상에 있었는데 이제 지극히 거룩한 곳으로 지성소로 옮겨왔습니다. 언약궤가 지성소 안으로 옮겨오자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니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갑자기 성전 안이 찬란한 구름으로 가득하였습니다. 11절에 그래서 제사장들은 성전 안을 메운 그 영광의 광채 때문에 자기들의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가 없었다. 다같이 11절을 읽겠습니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완공된 성전 안에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솔로몬이 완공한 성전 안에 구름으로 가득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특정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거룩함이 임하고 유지합니다. 봉헌 기념사 2. 솔로몬의 봉헌 기념사(12~21절) 본문 12절에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말합니다.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12-13). 솔로몬은 이런 고백을 한 후 군중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먼저 14절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15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여호와께서는 내 아버지에게(다윗) 약속하신 것을 지키셨는데 그 약속은 어떤 약속입니까? 16절에 기록됩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본문 16절에서 그 약속은 “여호와의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을 위하여 오직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다윗을 선택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으나(17), 여호와께서 다윗의 마음을 인정합니다(18). 그러나 본문 19절에서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정은 다윗이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런 이야기를 군중들에게 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그들과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을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 솔로몬은 이제 여호와께서는 이 약속을 지키셨다고 고백합니다.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내 아버지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21절 말씀에서 또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때 그들과 맺은 계약의 돌판을 넣은 법궤를 위해 성전에 한 장소를 마련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솔로몬의 군중에게 행한 연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성전 공사는 자신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 솔로몬 자신은 쓰임을 받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에 의해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알려면 성경을 봐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 하나님의 바르게 알고 믿을 때 우리 자신에 관해서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된 것과 약속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충성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봉헌 기도 3. 솔로몬의 봉헌 기도(22~30절) 본문 22절에서 솔로몬은 회중들에게 기념사를 한 다음 모든 회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단 앞으로 가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기도 내용은 23절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이어서 24절에서는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지키사 주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을 손으로 이루심이 오늘과 같으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약속과 전을 향해 기도드릴 때 들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30절에 “주의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주의 백성이 이곳을 향해 부르짖을 때도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합니다. 일곱 가지 기도 4. 민족을 위한 일곱 가지의 기도(31~53절) 1차로 본문 23~30절까지 기도를 드린 후 2차로 31~53절까지 기도는 계속됩니다. 31~53절까지의 기도 제목은 7가지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응답하소서(31~32절). ②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주님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간구할 때 응답하소서(33~34절). ③ 범죄하여 언약의 저주 조항에 해당한 가뭄의 때에 기도드릴 때 응답하소서(35~36절). ④ 기근이나 염병이 있으므로 기도할 때 응답하옵소서(37~40절). ⑤ 이방인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기도드릴 때 응답하옵소서(41~43절). ⑥ 주의 백성이 전투할 때 드리는 기도를 응답하옵소서(44~45절). ⑦ 범죄하여 포로로 잡혀간 와중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기도할 때 응답하옵소서(46~53절). 이스라엘 백성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이 성전에 계신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기도드릴 때 응답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같은 기도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응답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의지하는 자들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솔로몬의 축복기도 5. 솔로몬이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드립니다(54~61절). 솔로몬은 본문 54~55절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던 솔로몬은 이 모든 기도를 마치고 여호와의 제단 앞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그곳에 모인 군중들에게 축복하며 그의 연설은 계속됩니다. ① 태평과 모든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졌다(56). ② 우리와 함께해 주시고 떠나지 않는다(57). ③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야 한다(58). ④ 하나님은 주야로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59). ⑤ 오직 하나님만이 만민에게 여호와가 되신다(60). ⑥ 온전히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을 지켜 순종해야 한다(61). 본문 60절에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6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의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 완전하게 하여 오늘과 같이 그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킬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한 후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드린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그리고 함께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를 드린 후 이스라엘 회중들을 향하여 기념사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충성하며 헌신하며,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를 지킬 것을 호소합니다. 제사와 축제 6. 화목제의 희생을 드림으로 축제가 벌어집니다(62~66절). 솔로몬은 성전과 성전 내부 기구 설치를 다 미친 후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회중을 향하여 권면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 순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 제사를 위해 성전을 완공했고 성전 내부 기구 설치를 마쳤습니다. 본문 6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63절에서는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솔로몬 왕은 화목제로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를 드렸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왕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의 봉헌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제사를 드릴 때 본문 6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 날에 왕이 여호와의 성전 앞뜰 가운데를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번제와 소제와 감사제물의 기름을 드렸으니 이는 여호와의 앞 놋제단이 작으므로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음이라.” 본문 64절에 보면 그날 솔로몬 왕은 성전 앞뜰의 중앙을 거룩히 구별하고 거기서 불로 태워 바치는 번제와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와 그리고 화목제의 기름을 드렸다. 이것은 번제단이 너무 작아 거기서 이 모든 제물을 다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전 봉헌식의 축제는 7일 동안의 초막절을 포함하여 모두 14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65). 그런데 북으로 하맛 고개에서부터 남으로 애굽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본문 66절에 보면 여덟째 날에 솔로몬이 백성을 돌려보내매 백성이 왕을 위하여 축복하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습니다. 본문 마지막 구절인 66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솔로몬이 백성들을 돌려보내자 그들은 왕에게 복을 빌고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하여 이제 비로소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 낙성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통해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왕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과 함께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교훈과 적용 갈 3: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이어서 14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의 솔로몬 성전 건축과 그 성전의 기구 설치를 완료하여 이제 고정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신약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 신자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일들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붙잡고 있었던 그 약속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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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8] 성전 기구 공사를 완성하게 하신 하나님본문 / 왕상 7:1-51 지난 시간에 본문 6:1-38절, 즉 6장 말씀을 통하여 “성전 공사를 완공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성전이 완공되었다는 것은 이제 고정된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소위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이제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들은 그동안 이동식 텐트로 된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고정된 성전을 건축하여 완공했습니다. 이제 성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제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제사는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한 짐승이 제물로서 희생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희생제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주시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성전 약속은 장차 오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나를 대신하여 죄 없으신 주님이 하나님께 희생을 당하시는 속죄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표가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 약속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이번에는 열왕기상 7장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7장은 51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성전, 기구를 공사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성전을 완공했으니 그 성전기능에 해당한 각종 기구 공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 왕궁 건축 1. 솔로몬의 왕궁, 30년 만에 완공(1-12) 열왕기상 6장과 7장은 성전을 건축하는 기록입니다. 그 기록 중에 7:1-12절은 솔로몬의 왕궁을 건축하는 기록을 삽입시키고 있습니다. 1절에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자기 궁전을 13년 동안 건축하며 준공하였습니다. 2절에 보면 그 궁전에는 레바논의 숲이라고 부르는 궁이 있었습니다. 그 규모는 길이가 45m, 폭이 22.5 미터, 높이가 13.5m이었으며 네 줄의 백향목 기둥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세 줄의 들보가 얹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들보는 한 줄에 15개씩 모두 45개였습니다. 4절에 그 궁의 양쪽 벽에는 세 줄의 창문이 나 있습니다. 5절에 모든 출입문과 창문은 4각형으로 만들었으며 양쪽 벽에 있는 그 세 줄의 창문들은 서로 마주 보게 하였습니다. 6절에 솔로몬은 주랑을 만들었습니다. 그 길이는 22.5미터이고 폭은 13.5미터이며 그 기둥 앞에는 현관 하나를 붙여 지었습니다. 7절에 그는 또 왕좌를 놓고 앉아서 재판할 집무실도 지었는데 바닥에서부터 천정까지 온통 백향목 판자로 덮었습니다. 8절에 보면 솔로몬의 관저는 그의 집무실 뒤편의 다른 뜰에 있었습니다. 또한 9절에 아내인 바로의 딸을 위해서도 이와 똑같은 궁을 하나 더 지었습니다. 9절에 이 모든 건물은 기초에서 처마까지 값비싼 좋은 돌을 다듬어 지은 것이며 그 돌들은 치수대로 잘라 그 면을 가는 톱으로 잘 다듬은 것이었습니다. 10절에 그 기초석은 질이 좋은 큰 돌로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어떤 것은 4.5미터, 어떤 것은 3.6미터였습니다. 11절에 그 기초석 위에는 치수대로 다듬은 좋은 돌을 쌓고 그 위에 백향목 들보를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12절을 읽겠습니다. “또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성전 안뜰과 주랑에 놓은 것 같더라.”라고 합니다. 궁전의 큰 뜰은 현관이 딸린 성전 안뜰처럼 다듬은 돌을 세 층으로 쌓고 그 위에 백향목 판자 하층을 얹은 담으로 만들었습니다. 놋 제작 2. 놋을 잘 다룬 히람을 불러옴 (13~14절) 13~14절에 “솔로몬 왕이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저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두로 사람이니 놋 점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이 구비한 자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작을 하니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은 두로에서 히람이라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납달리 지파 사람이었고 죽은 그의 아버지는 놋세공 기술이 뛰어난 두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분야에 훌륭한 재능을 가진 숙련공이었으므로 그는 솔로몬 왕의 부탁을 받고 와서 여러 가지 놋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최고의 기술자에 의해서 최고의 놋으로 만든 성전 기구를 만들게 합니다. 놋기둥 규모 3. 히람이 만든 큰 놋기둥 둘의 규모 (15~22절) 15절에 “저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고는 각각 십 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라고 합니다. 놋쇠를 녹여 성전 앞에 세울 기둥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둥의 각각의 높이는 8미터였고 둘레는 5.5미터나 되었습니다. 원통 모양의 기둥 속은 텅 비었습니다. 기둥 놋쇠의 두께는 약 8센치미터였습니다. 21절에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습니다. 여기 ‘야긴’이란 말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라는 말이고 ‘보아스’는 “능력이 그분에게 있다”라는 말입니다. 기둥을 세우고 이같은 기둥의 각각의 이름을 붙인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세워 주시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매사가 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물통 4. 큰 놋쇠 물통 (23~26절) 23절에 “또 바다를 부어 만들었으니 그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고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만하며”라고 합니다. 히람은 놋기둥을 만든 다음에 또 구리를 녹여 부어서 거대한 물통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직경이 4.5미터, 높이가 약 2.3미터, 둘레는 13.5미터였습니다. 그 가장자리 아래에는 돌아가면서 4.5센티미터 간격으로 두 줄의 놋조롱박이 하나씩 달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탱크와 하나로 주조된 것이었습니다. 사발 모양의 이 물통은 바다 같이 많은 물을 담는다는 뜻에서 “놋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놋쇠 받침대 5. 10개의 놋쇠 받침대를 만듦 (27~39절) 27절에 “또 놋으로 받침 열을 만들었으니 매 받침의 장이 네 규빗이요 광이 네 규빗이요 고가 세 규빗이라.” 히람은 놋쇠를 녹여 부어서 받침대 10개를 만들었습니다. 이 받침대는 순례자들이 결례를 행하는 물을 제공하고 제물을 드린 후 제단과 뜰을 씻기 위해 담은 물통의 받침대입니다. 히람은 놋 받침 열 개를 만들었는데 이것들은 그 모양과 크기가 모두 같았습니다(37). 그리고 그는 놋 받침 위에 얹을 물통 열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직경은 모두 1.8미터이며 물통 하나의 용량은 880리터였습니다(38). 그리고서 그는 놋 받침 다섯을 성전 오른편에 두고 다섯은 성전 왼편에 두었으며 물탱크는 성전 우측의 남동쪽 모퉁이에 두었습니다(39). 성전 비품 총 목록 6. 히람이 만든 성전 비품의 총목록 (40-51) 본문 40절에 “히람이 또 물두멍과 부삽과 대접들을 만들었더라 이와 같이 히람이 솔로몬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의 모든 일을 마쳤으니”라고 합니다. 과거 성막에서보다 성전에는 많은 기구가 필요했습니다. 41~46절까지 보면 성전 기구를 만든 구체적인 목록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그러고 나서 47절에 보면, “기구가 심히 많으므로 솔로몬이 다 달지 아니하고 두었으니 그 놋 중수를 능히 측량할 수 없었더라.”라고 합니다. 성전 기구들이 엄청나게 많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모든 기구의 중량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47). 솔로몬은 다른 성전 기수들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제단, 항상 빵을 차려 놓는 차림상, 지성소 앞 좌우에 다섯 개씩 놓을 등대, 꽃 장식물, 등잔, 불집게, 대접, 심지 자르는 가위, 주발, 국자, 불을 옮기는 그릇, 그리고 지성소의 문과 성전 출입문의 돌쩌귀였으며 이 모든 것은 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본문 51절에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의 이 모든 기구를 만들고 나서 자기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께 드린 은과 금과 그 밖의 기구들을 성전 창고에 넣어 두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께서 임재의 상징인 성전에서의 각종 기구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 구원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 또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엡 2:21-22). 구약의 성전 건축과 그 성전기능들을 위한 각 기구를 만들어 성전기능이 완벽하게 진행하도록 하기 위해 성전이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가 지체되어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이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의 지체로서 서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구원의 은혜를 통해 각자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그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 덕을 위해 우리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에 따라 주신 선물입니다. 이러한 선물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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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론 7] 성전 건축을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본문 / 왕상 6:1-38 지난 시간에 5:1-18절 말씀을 통해 “성전 건축을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 패턴이 달라집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본문은 열왕기상 5장입니다. 5장은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전 건축 준비를 솔로몬의 치적으로 내세워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했느냐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런 형식으로 성경에 접근한다고 하여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솔로몬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솔로몬의 자서전이 아닌 하나님 계시의 말씀이므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성전 건축을 요구하십니까? 그것은 열왕기상 5장에는 드러나지 않는 내용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 일들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막과 성전에서 만나주시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성전을 요구했고 그 성전이 건축되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여기에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본문인 열왕기상 6장을 통해서 성전 공사를 완공하게 되는 사건이 기록된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성전을 완공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핵심이 되겠습니다. 성전 구조 1. 출애굽 480년 만에 착공되는 성전 구조(1-10) 본문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나고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는 해 2월에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면서 민족적인 단위로 번창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 즉 출애굽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15장에서 약속하신 약속대로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창 15:16)라는 말씀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 이동식 텐트인 성막을 통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경험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480년 만에 드디어 이동식 성막이 아닌 고정된 성전을 건축하여 그 성전에서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이 완공될 때는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는 해의 2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통하여 약속하기를 성전은 다윗이 아닌 그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본문 2절에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은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며”(성전 규모는 길이가 27미터, 폭이 9미터, 높이가 13.5미터였으며) 3절에 “성전의 성소 앞 주랑의 길이는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너비는 성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성 앞의 현관 폭은 9미터이고 그 길이는 4.5미터)였습니다. 성전의 구체적인 규모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중심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관 역시 성전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성전과 얼마나 가까지 있느냐로 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이었습니다. 본문 9절에는 “성전의 건축을 마치니라 그 성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성전 외부 공사를 마치고 서까래와 백향목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또 온 성전으로 돌아가며 높이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성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또한 그 3층 별관의 들보는 백향목으로 만들었으며 각 방의 높이는 약 2.3미터였습니다. 이동식이었던 성막과 고정된 성전은 외견상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막과 성전은 공통으로 지녀야 할 기본적인 구조는 같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고 두 그룹이 있고 분향단과 떡상, 등대, 물두멍 등의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성막이든 성전이든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하시겠다는 데는 동일합니다. 언약 재확인 2. 여호와께서 디윗과 세운 언약을 솔로몬에게 재확인시켜 줍니다(11-13절) 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솔로몬에게 임했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식으로, 자신의 경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에 따라 실천해야 합니다. 비록 왕이지만 하나님 백성의 자리에서 순종하며 나를 통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은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12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열거됩니다. 첫째 법도, 둘째는 내 율례, 셋째는 모든 계명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도요 계명입니다. 그 법도와 율례와 계명을 “지켜 행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진리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인이신 하나님께 충성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왕이신 하나님은 충성하는 백성들에게 왕의 하사품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언급된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면 다윗과 맺은 약속의 말씀을 솔로몬에게도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이 주신 말씀의 법도를 떠나지 않고 지킬 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 대한 보장이 13절에 기록됩니다.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는 것을 들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요 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성전 내부 마무리 3. 성전의 내부 공사가 마무리됩니다(14-36절)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 시작하게 하신 성전 건축은 하나님께서 이를 이루십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러한 명령을 들은 솔로몬은 순종하여 성전을 건축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 건축 공사는 하나님이 명령만 하고 무관심하게 지켜보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하나님이 이를 이루어가십니다. 솔로몬은 이 거룩한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열심은 결국 하나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본문 14절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기를 마치고” 나서 내부 공사를 진행합니다. 15절에 보면 내부 벽을 백향목으로 입히고 마룻바닥은 잣나무로 만들었습니다. 16절에 성전 뒷벽에서 9미터 떨어진 곳에 바닥에서 천정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지성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앞에 있는 성소의 길이는 18미터입니다(17). 또 성전 내부 벽에 입힌 백향목 널판에는 조롱박과 활짝 핀 꽃들을 아로새겼는데 성전 내부 벽이 온통 백향목으로 둘러싸여 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18). 성전은 다양한 재료가 필요합니다. 성전의 기능을 위해 다양한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의 완성품인 성전을 완공합니다. 각 재료와 구조에 따라 필요로 하는 기능들은 모두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 된 주님을 중심으로 한 우리 지체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본문 19절에 드디어 여호와의 법궤를 두기 위해 성전 안에 지성소를 만들었습니다. 그 길이와 폭과 높이는 각각 9미터였으며 지성소 내부는 온통 순금으로 입히고 그 안에 백향목 단도 만들어 놓았습니다(20). 또 솔로몬은 성소 내부를 순금으로 입히고 지성소 앞에 금사슬을 쳐놓았습니다(21).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 안에서는 만나 단지, 깨진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등이 있습니다. 이 모두는 이스라엘 불순종의 상징들입니다. 이러한 불순종의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22절에 “온 성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는 말씀으로 내부 공사가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성전 내부를 모두 금으로 입히고 또 지성소 안에 있는 단에도 금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그룹들이 마무리됩니다(23-28절). 지성소 안에는 감람나무로 두 그룹 천사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높이는 각각 4.5미터씩이었으며 둘 다 크기와 모양이 같고 각각 약 2.3미터 길이의 두 날개를 가졌으며 한쪽 날개 끝에서부터 다른 쪽 날개 끝까지의 길이는 4.5미터였습니다. 또한 성소와 지성소의 사면 벽의 조각과 문짝을 제조합니다. 또한 안뜰도 만듭니다(36절). 성전 내부 시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공사는 오늘날 우리가 집을 건축한다거나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과 같은 차원의 공사는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줄 하나님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행해진 공사입니다. 이 성전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상징성이 있습니다. 성전 완공 4. 7년 만에 성전 공사가 끝납니다(37-38절) 37절에 “넷째 해 시브월에 여호와의 성전 기초를 쌓았고”, 38절에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 4년 2월에 성전 기초를 놓았고 11년 8월에 설계대로 성전이 준공되었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데 소요된 총 공사 기간은 7년 6개월이었습니다. 그동안 애굽에서 구출을 받아 나온 지 487년 만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는 장소인 성전을 주셨습니다. 그동안 그 성전이 이동식 성막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한곳에 고정되어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정착할 수 있는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왔어도 대적과의 전쟁 때문에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고정된 성전을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교훈과 적용 우리는 열왕기상 6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 성전 건축을 위해 모든 재료를 준비토록 해 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성전의 규모를 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전을 통해 솔로몬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도를 따르며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다윗과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러한 언약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계승하여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하신 약속이 여러 인물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열왕기서에서는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있어서 성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제물을 통해 제사를 드리므로 그들의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를 용서받지 않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외부의 적들에 멸망당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성전에서 드려진 제사의 제물을 통해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과 언약을 지켜나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구원 왕국이 신약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열왕기서에서 완공된 성전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이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체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하고 대리한 제물이 저주의 희생을 당하므로 제물을 드린 이스라엘 백성이 저주를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나를 대신하고 우리 모두를 대표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속”, “속량”이라는 말로 정리합니다. 이런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각자마다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잘 확인해야 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