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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해 13] 유다 요아스 …

왕하 12:1-21

[왕하 강해 13] 유다 요아스 왕의 성전수리와 실책-암살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11장 말씀을 통하여 “유다왕조의 씨를 진멸하려는 아달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남쪽 유다 왕인 아하시야가 죽게 되자 그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그의 손자들을 다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아달랴는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합왕의 아내가 이세별이었다면 아달랴는 이세별의 딸이기도 합니다. 악한 이세별의 딸인 아달랴가 정통성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열인 유다왕국을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무려 6년 동안 아달랴가 남쪽 유다를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달랴가 손자들을 다 죽일 때 요아스는 성전에 숨겨져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일곱 살 되는 해에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가 경비대장들과 함께 아달랴를 죽이고 정통성 있는 왕족인 유다 나라의 요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파괴하려고 했던 아달랴는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합니다.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1. 요아스가 40년 동안 남쪽 유다 예루살렘을 치리합니다(1-3절). 본문 1절을 보시겠습니다. “예후의 제칠 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고 합니다. 요아스의 할머니인 아달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 이후 요아스가 유다 나라 왕이 됩니다. 40년 동안 치리했습니다. 그는 대체로 정직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나라는 다스렸지만 산당은 제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라고 합니다. 제사장 여호야디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은 요아스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놓은 실수를 범합니다. 3절에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진행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백성은 왕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버립니다. 대신 바알신을 자신의 주님으로 섬깁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을 징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 육신적인 세력을 남겨 놓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육신적인 세력들이 성장합니다. 나중에 그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생각과 사고방식에 오히려 점령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한 두 번 빠집니다. 그러다가 빠지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이제는 아예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협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과감하게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산당은 제거하지를 못한 실수를 범하여 이 문제로 백성이 우상에서 제사를 지내는 불행한 모습이 그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2.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에게 백성이 드리는 은으로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4-8절). 요아스 왕은 각 제사장에게 백성들이 낸 은으로 여호와의 전인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왕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본문 4절에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이라고 합니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예물로 바친 모든 은, 곧 각 사람이 세금으로 바친 은과 각 사람이 약속하여 바친 은과 스스로 원해서 바친 은을 받아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제사장마다 그가 섬기는 백성들에게 은을 받아서 성전을 수리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수리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성전의 기능은 이렇게 중요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과 같은 중요한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이 깨끗하고 수리돼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백성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낸 은으로 그 성전을 수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5절).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들이 그 성전을 수리하지 않습니다. 수리할 부분이 없어서 수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수리할 부분이 많이 있는데도 수리하지 않습니다(6절). 이때 요아스 왕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를 부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이십삼 년째가 되었는데도 제사장들은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7절에 이렇게 명령합니다.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성전에 드리는 은으로 제사장들이 명령대로 성전을 수리하는데 지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제사장들이 받아 관리했던 은을 오직 성전 수리하는데만 사용하도록 백성들이 직접 성전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3. 왕의 명령대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성전을 수리합니다(9-16절). 백성들이 성전에 직접 낸 은으로 성전 수리하는 비용으로 지출하는 말씀입니다. 10절에 보면 궤 안에 돈이 가득 차면 왕의 신하와 대제사장이 와서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온 돈을 계산하고 그 돈을 자루에 담았습니다. 11절에 돈 계산이 끝난 뒤에는 그 돈을 성전 공사를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일하는 목수와 돌 쌓는 사람들의 품삯으로 쓰게 했습니다. 온전히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는 특별 재원이었습니다. 이제 그 돈으로 미장이와 석수들에게 품삯을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나무와 돌을 사들이는 데에도 썼습니다. 그 밖에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 드는 모든 비용에도 그 돈을 사용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성전에 드린 은을 다른 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전 수리하는 비용에만 사용되었습니다(13-14절). 너무나 오랫동안 성전을 수리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성전 수리하는데 비용을 사용하지 않고 성전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성전이 방치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곳은 어떤 공간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한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그것은 오직 제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전이 수리를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불순종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요아스 왕은 성전 기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전을 수리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성전 그 자체가 무너져 있다면 그 성전 안에 제아무리 좋은 기물을 만들어 놓는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아스 왕은 무너진 성전을 수리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남쪽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너진 상전을 증축하고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 공사는 이방인들로 인하여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중단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위로하는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와서도 그 성전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수리한다는 것은 요아스의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이같은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성전을 수리하기 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은을 모았듯이 우리도 성전을 짓고 수리하기 위한 헌금합시다”라는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을 그대로 오늘날 예배당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 성전은 오늘날 적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적용해야 합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곧 자기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제 신자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고전3:17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고후 13: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성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즉 성령이 우리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 거룩하심을 훼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침략해 온 아람 왕 하사엘에게 성물을 주어 돌려보냅니다(17~18절) . 요아스 왕 때 아람 왕이었던 하사엘이 침략해 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방 대적이 침략해 왔습니다(17절). 이런 상황이라면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들을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태도를 보십시오. 18절에 보면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라고 합니다. 유다 왕 요아스가 자기 선대의 유다 왕들인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거룩하게 바친 모든 성물들과 자기가 바친 성물들, 그리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 창고와 왕궁에 있는 모든 금을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루살렘에서 물러갔다. 요아스 왕은 선조들이 구별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린 성물과 금을 취하여 하사엘에게 뇌물로 줍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뇌물로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뇌물이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왕의 발상이나 그런 뇌물을 받고 물러가는 하사엘이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께 원치 않는 일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심판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결정하고 기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편법으로 일을 진행할 때 처음에는 제법 그런대로 잘 풀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일이 잘 진행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기 치지 않고 편법으로 하지 않으면 무슨 사업이 됩니까”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원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5. 요아스가 암살당하여 죽고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19-21절). 요아스 역시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라고 합니다. 요아스는 비참에게 남쪽 유다 열왕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그가 어렵게 왕이 되긴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왕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잘못한 행위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남 왕조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치리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습니다. 요아스가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묻혔습니다. 저는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역대하 24:25에 의하면 요아스가 다윗성에 장사 되긴 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죽자 아들 아마샤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죽었지만, 그의 아들 아마샤가 남 왕조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진행됩니다. 교훈과 적용 아하스는 남 왕국 왕으로 심복에게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을 수리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성전 수리는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가 드려지기 위한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전의 금은보화를 이방 왕에게 뇌물로 바치는 불법을 범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긴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요아스 왕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제사와 제물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사자를 살리기 위해 대리자의 희생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에서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그는 어린양의 제물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 열왕기하 12장에서도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순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왕하 강해 12] 유다 왕조의 …

본문 / 왕하 11:1-21

[왕하 강해 12] 유다 왕조의 자손을 진멸하려는 아달랴

지난 시간의 말씀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10장 말씀을 통하여 “예언대로 아합의 집을 심판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북 왕국에 예후를 세워 하나님의 예언대로 심판 사역을 진행해 가십니다. 예후가 등장하여 북 왕국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죽입니다. 또한 요람과 함께 범죄의 길로 갔던 남 왕국 아하시야도 죽입니다. 북 왕조의 아합왕의 범죄 때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해 주신대로 그 아합의 가정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10장에서 살펴본 바입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합의 일가친척들도 다 멸망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충실한 종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 충실하지 않고 범죄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은 가하실 때 그 기준은 언약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거부한 자들이나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주어질 것입니다. 1. 유다의 아하시야가 죽은 후 그의 모친 아달랴가 통치를 합니다(1-13절) 이제 역사적인 상황과 배경은 다시 남 왕국 유다로 넘어왔습니다. 유다 왕조의 족보는 여호람의 왕에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에게로 넘어왔습니다. ‘여호람’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시대에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라고 했습니다(왕하8:18,27). 그런데도 그 남쪽 유다(창49:10)와 다윗과(왕하8:19) 맺은 언약 때문에 그 유다를 멸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다 족속을 통하여 왕위가 계속 계승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남 왕조의 왕인 ‘여호람’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달랴’였습니다. 여호람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께 범죄 하자 북왕조의 ‘예후’왕을 통해 그를 심판하였습니다. 그의 모친이었던 아달랴가 유다왕조(참고 유다왕조 : 다윗-솔로몬(왕상1:47) - 르호보암(왕상11:43) - 아비얌(왕상14:31) - 아사(왕상15:8) - 여호사밧(왕상15:24) - 여호람(왕상22:50) - 아하시야(왕하8:24) - 요아스(왕하11:21)의 정권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아달랴는 어떤 여인입니까? 아달랴는 쿠데타로 북 왕조의 왕이 되었던 오므리왕의 손녀입니다(왕하8:26). 오므리왕의 아들이 아합왕이었기에 오므리의 손녀라고 하면 아합의 딸입니다.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람왕이 북 왕조(참고 북 왕조; 여로보암(왕상14:20) - 나답(왕상14:20) - 바아사(왕상15:28) - 엘라(왕상16:6) - 시므리(왕상16:10) - 오므리(왕상16:16) - 아합(왕상16:29) - 아하시야(왕상22:40, 아합의 아들) - 여호람(요람)(왕하3:1, 아합의 아들) - 예후(왕하9:13)의 아합왕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왕하 8:18). 아달랴는 북 왕조 아하시야의 모친인 셈입니다(왕하11:1). 남 왕조는 한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북 왕조는 그렇지 않습니다(위 북 왕조의 족보에서 밑줄 친 부분은 서로 다른 혈통, 즉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것을 말함, 그러나 남 유다는 한 혈통임). 북쪽 이스라엘은 모반과 쿠데타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난 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왕의 혈통이 유다 족속으로 한정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와서 남쪽 유다 왕인 아하시야가 죽게 되자 의 모친 아달랴가 정권을 잡으려고 합니다. 아달랴는 북 왕조의 아합의 딸입니다. 아합의 아내, 즉 아달랴의 모친은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이 얼마나 악했으며 피를 보았습니까? 그 딸도 남쪽 유다 왕조로 시집와서 자기가 왕권을 잡으려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본문 11:1절에 “왕의 자손을 진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남쪽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 줄기입니다. 그 왕통의 씨를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쪽 유다 왕통을 북 왕조의 아합의 딸이 제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장난입니다. 아달랴가 유다 왕통을 진멸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은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아달랴의 피의 숙청 속에서도 아하시야의 아들인 요아스를 그의 누나가 숨겨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메시아의 계열의 족보를 중단시키지 않겠다는 섭리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가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2. 아달랴의 숙청 속에서도 요아스를 숨겨 왕으로 세워 유다 왕의 자손을 잇게 합니다(4-12절)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3절). 이제 하나님의 때가 차매 본문 4절에 보면 7년 만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제사장이 왕의 경호대장과 왕궁의 경비대장을 성전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제사장은 그들과 아달랴를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성전에서 그들로 맹세케 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그동안 6년 동안 숨겨났던 왕자인 요아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달랴를 제거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이 진행됩니다. 호위병의 일부는 아달랴를 지키게 하고 일부는 성전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래 놓고 그 성전 안에서 제사장인 여호야다는 요아스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약속이 7년 만에 재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중단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실패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근 6년 동안의 기간은 북 왕조의 아합의 딸인 아달랴를 심판하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탄 마귀가 장난하고 방해한다고 해도 실패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한다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은 실패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사탄 마귀는 자신들이 승리한 줄 착각하여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순간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심판의 절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절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좌절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나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서 지금 우리를 감찰하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백성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 충성하며 바르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아달랴를 성전 밖에서 죽입니다(13-16절) 성전 안에서는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하시야를 이어 요아스가 유다의 왕위에 오르는 행사 때문입니다. 만세 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것을 호위병에 의해서 갇혀 있는 아달랴가 듣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가서 그 광경을 보게 됩니다. 다같이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매 왕이 규례대로 단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셔 섰으며 온 백성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자신이 유다의 왕인데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장면을 본 아달랴는 그들이 반역하고 있다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느 호위병도 그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합니다. 이미 제사장과 다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인 여호야다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달랴 자신이 반역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누가 그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습니까?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쿠데타로 스스로 왕이 되었을 뿐입니다. 아달랴의 친아버지 ‘오므리’는 북왕조의 ‘시므리’ 왕을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북 왕국의 왕이 된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 집안에서 남 왕국의 왕의 집안으로 시집와서 자신도 남 왕국을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호위병에게 성전에서 그를 죽이지 말고 성전 밖으로 끌고 가 죽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만약에 그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죽이라고 합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의 길을 열어주매 그가 왕궁의 말이 다니는 길로 가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 부정한 한 여인, 권력에 눈이 어두운 여인, 사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그 여인이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죽을 몸, 무엇이 그렇게도 대단하다고 죄를 짓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 잘 섬기며 살다가 우리 주님이 부르시는 날 잘했다고 칭찬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요아스가 7세에 왕이 되고 유타왕조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17-21절)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남쪽 유다의 왕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마치 왕이 됩니다. 마치 아달랴와 같은 여인입니다. 아달랴라는 그 여인은 그의 어머니 이세벨과 함께 피를 많이 부른 여인입니다. 우리의 옛말에 딸을 보려면 그 어머니를 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배우며 자랐겠습니까? 교육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17절에서는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18절을 보겠습니다.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을 수직하게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진행됩니다. 모든 우상 단지를 제거합니다. 바알의 제사장을 죽입니다. 회개의 운동입니다. 드디어 나라가 평화가 임했습니다. 온 국민은 즐거워했습니다. 2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더라.” 누구는 좋아하는데 누구는 죽습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자가 심판을 받고 어떤 자가 영생을 소유합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1절에 보시면 “요아스가 왕이 될 나이가 칠 세였더라”고 합니다. 6년 동안 아달랴의 왕족에 대한 피의 숙청으로 성전에서 숨어 지낸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 7세였다고 한다면 그 요이스의 부왕인 아하시야가 요아스를 낳자 마자 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유다 왕통을 이을 수 있도록 아들을 출산할 때까지 살려주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까? 그 하나님께 순종하시며 헌신하시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훈과 적용 구약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창세기에서 약속해 주신대로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유다를 통해서 이어집니다. 유다 지파를 통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구약성경은 그 성취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다 왕조의 자손을 진멸하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중단시키고자 하는 전형적인 사탄의 장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의 뜻대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 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북 왕국, 예언대로 아합의 집을 …

왕하 10:1-36

북 왕국, 예언대로 아합의 집을 심판하신 하나님

왕하 10:1-36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9:1-37절 말씀을 통하여 “예후를 세워 북왕조 요람을 심판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말씀대로 북 왕조의 요람을 심판하셨습니다. 요람을 심판하시고 이세벨을 심판하신 모습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요람과 이세벨은 아합의 집안사람입니다. 요람은 아합의 아들이요,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합의 집이 심판당한다는 하나님의 예언으로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상, 즉 부모 때문에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심판받은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요람 역시 심판받는 집안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범죄의 길로 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심판받아 마땅한 자녀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잘 섬긴다는 것은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의 생활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아합의 후손을 다 죽입니다(1-11절). 하나님께서는 이미 열왕기상 21:20-22절에서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이미 9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열왕기상 21:20-22절을 말씀을 살펴본 다음에 본문을 살펴보시겠습니다.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아합이 자기를 찾아온 엘리야에게 “이 원수, 네가 또 나를 찾아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겁에 질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찾아온 까닭은 왕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구체적으로 재앙을 내린다고 말씀합니다. 아합왕뿐만 아니라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네 집안의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본문 열왕기하 10:10절 말씀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다같이 10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이미 아합의 집이 멸할 것을 예언하셨는데 “이제 이루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후가 이미 남 왕국 왕인 아하시야와 북왕국 왕인 요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북쪽 이스라엘에 모든 사람은 예후를 두려워하였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 왕이 그를 당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예후가 이스라엘의 모든 장군과 아합의 후손들을 잘 받들어 섬기고 있는 고위직에 몸담은 관료들에게 싸우자고 할 때 그들이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그들이 사람을 시켜 예후에게 보냈습니다. 무슨 말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왕궁 관리와 성의 지도자와 장로와 아합의 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후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왕으로 세우지 않겠습니다. 당신 마음에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이 말은 예후에게 항복한다는 말입니다. 첫째, 이제 그들이 예후에게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후 외에는 다른 왕을 세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제 명령만 내리면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던 예후는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내용이 6절 말씀입니다. “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 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예후가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립니다. 아합의 후손 70명을 모두 죽여 머리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후의 말대로 그들을 죽여 머리를 가져왔습니다(8절). 이 머리를 성문 앞에 두 무더기로 쌓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예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합의 후손이 이렇게 멸망 당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제 이루셨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엘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성취되었습니다. 신명기 18:22절에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예언은 분명히 성취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아니라 참 예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의심하면 안 됩니다. 믿고 의지하고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됨을 거부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들 못지않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2. 남쪽 유다 왕이었던 아하시야의 형제들도 죽입니다(12-14) 예후가 이스르엘에서 아합의 후손들을 다 죽이고 다시 사마리아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남쪽 유다의 아하시야왕의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후는 아하시야 왕을 죽였습니다. 그 왕의 형제들을 만나 묻습니다. 13절에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라고 합니다. 예후는 아합의 후손들을 여호와 예언의 말씀대로 다 죽이고 돌아가는 도중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합의 후손들인 이세벨과 왕자들과 아합왕의 친척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예후 왕은 그들을 웅덩이 곁에서 죽였습니다. 죽은 자들이 무려 42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 편에 서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이 비록 남쪽 유다의 아하시야 왕들의 형제들이라도 별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언약 계열로 인정받은 남쪽 유다 백성들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과 한 편이 된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소속의 신분이 문제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 백성의 신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소속된 신분을 소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20절에서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이 세상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되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3. 아합에게 속한 나머지 친척들을 진멸합니다(15-17절) 계속해서 예후의 발걸음은 사마리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또 여호와께 충성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나답이 먼저 예후를 만나러 왔습니다.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네가 나를 믿고 찾아온 것처럼 내가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라고 말하자 예후는 여호나답을 자신의 병거로 끌어올려 함께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아합에게 속한 모든 친척들을 진멸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17절애 보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되리라는 말씀대로였습니다. 4. 바알 선지자와 숭배자들을 진멸합니다(18-29절) 예후는 지금까지 아합의 집을 다 진멸하였습니다. 이제 눈을 돌립니다. 어디로 돌리느냐면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과 바알의 선지자들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후가 무참하게 아합의 집을 진멸시킬 때 많은 사람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예후는 일을 꾸밉니다. 거짓말을 하여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을 다 모이게 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지만, 자신은 많이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알에게 큰 제사를 지내려고 하니 모든 바알의 선지자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은 다 자신 앞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인 그들을 모두 다 처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에 나오지 않는 자들은 다 죽일 것이라고 공포합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바알의 선지자들과 숭배자들이 예후 앞에 모였습니다. 다같이 23절을 읽으시겠습니다.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이 따로 모이게 하여 그들만을 구별하기 위하여 예복을 입힙니다. 그들이 바알을 섬기려 바알의 당에 들어갈 때 예후는 밖에 80명을 대기시킵니다. 그 80명에게 한 사람도 살려주지 말고 죽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도망가게 했을 때 그 사람은 죽을 것을 말합니다.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 비참하게 죽는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본문 25-27절 말씀입니다.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런 무서운 심판은 장차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심판의 모습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마치 바알 숭배자들이 예후에 의해서 몰살당했던 것처럼 그렇게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처단했던 예후의 행위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28-29절 말씀입니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을 이렇게 한번 적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예배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나 첩을 거느리고 살았다.’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 봉사는 잘하였으나 부모를 버렸고 남편과 이혼했다.’ 이 또한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이런 행위는 결국 자신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치 예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까? 5. 예후의 통치와 죽음 (30-36절) 첫째 예후의 선과 악입니다(30-31절). 하나님께서 예후를 북왕조의 왕으로 세운 것은 아합의 집에 내리기로 하신 심판을 대신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합의 집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자로 예후를 선택했습니다. 즉 하나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후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잘 감당합니다. 30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예후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잘 수행했기에 예후의 자손이 4대까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 이후는 허락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1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예후이라도 열외가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둘째, 북 왕조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32-36절). 예후가 통치한 그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영토가 대적에게 조금씩 침략당해 빼앗기게 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람의 하사엘로 하여금 북쪽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심판의 예언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열왕기상 19:17절에서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후가 결국 죽습니다. 전혀 죽지 않고 영원토록 권력을 누릴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이 세상을 떠난 가련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28년 동안 다스린 후에 죽게 되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예후의 자손 4대까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앞에 살아남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의 역사와 북쪽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통해서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역사를 거룩한 역사, 구원의 역사. 계시의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본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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