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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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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합동 측과 통합 측의 신학…

신학적인 태도와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

장로교 합동 측과 통합 측의 신학적 차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1959)는 합동 측과 통합 측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에 대해 통합 측은 줄기차게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 사기 당한 사건을 덮기 위한 교권 투쟁이 결국 분열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합동 측은 박형룡 박사의 3천만 환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신학적인 W.C.C문제가 제기되어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영재 박사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교회사』에서 제44회 총회 분열은 교권의 갈등이 아닌 신학적인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김영재, 『한국교회사』(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2), 290). 그는 “그러나 W.C.C.에 대한 견해 차이는 우연히 초래한 사소한 것이 아니았다”라고 말하면서 이는 “사소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결국, 신학적인 태도와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라고 분명히 했다. 김 박사는 “그리고 그 차이는 세월이 감에 따라 누구나 쉽게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두드러진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발전하였다”라고 평가했다. 분열된 “합동 측의 총신대학은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을 보수”하는 반면, “통합 측의 장로회신학대학은 보수와 진보 사이의 긴장 속에서 자신들의 신학은 양쪽 신학의 장점을 계승하는 포괄적인 신학이라고 규정한다”라고 했다. 박용규 교수는 “1959년 교단의 분열 이후 뚜렷이 다른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통합 측은 W.C.C.운동을 축으로 세계교회와의 교류를 추진하였고, 합동 측은 신학적인 보수성을 표방하면서 전도와 선교에 주력하였다”라고 했다(박용규, 『한국기족교회사Ⅱ』, 1011).

영국인 맥스웰과 바실 홀의 한국 …

서천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

영국인 맥스웰과 바실 홀의 한국 접촉과 성경전달

맥스웰(Muray Maxwell) 대령 영국의 배질 홀(Basil Hall)은 에딘버러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하여(1802), 초급장교 시절에는 주로 북미주에 근무했다. 1812년부터는 프리기트함 볼테이지(Voltare) 호의 장교로 동인도회사에 근무했다. 이때 그는 스루프형의 범선 리라(Lyra)를 타고 중국 광동성을 찾게 되는데 그 귀국 길에 알세스트호(Alceste)의 선장 맥스웰(Muray Maxwell) 대령과 함께 서해를 탐사하였다. 홀은 「조선서해탐사기」라는 기록을 남겼다. 한반도 서해안을 탐사한 것은 1816(순조 16년) 9월 1일부터 10일까지였다. 그의 일행은 잠시 육지에 상륙하여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과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수화(手話)로써 의견을 나누면서 성경을 전달했다. 1816년 9월 1일에 황해도 백령도(白翎島), 대청도(大靑島), 소청도(小靑島) 등에 상륙해 측량하고 해도를 작성했다. 그들이 비인만(庇仁灣) 마량진(馬梁鎭)에 도착했을 때,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을 초청해 알세스트 호에 안내했고, 다시 조대복과 비인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承烈)을 리라 호에 안내해 구경시켰다. 그들은 조선에 오기 전에 중국에 들렀는 데, 그때 중국에 있던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부탁 대로 조선사람에게 중국어 성경을 전했는데, 첨사 조대복은 이 성경을 정중히 받아 조정에 전달했다. 즉, 1816년 9월 4일에 개신교 성경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달된 셈이다. 순조 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한 권은 첨사에게 한 권은 현감에게 주어 책을 펴본즉 알 수가 없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순조실록 16년(1816) 7월 병인조(丙寅條)에 의하면, 이때 홀 일행을 만나 사람은 마량진(馬梁鎭 첨사(僉事) 조대복(趙大福)과 비인(庇仁) 현감 이승렬(李升烈)로 되어 있다. 당일자 실록에 실린 충청 수사(忠淸水使) 재홍(李載弘)의 장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했습니다.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口: 구리로 만든 거푸집]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 내용에, 영길리국(英吉利國)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 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중략 출처 : 『조선왕조실록』 순조 16년 7월 19일(병인)조.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진이 성경이 최초로 한국에 전래된 지점이라는 것은 최근에서야 역사적 사실로 고증되었는데, 2002년 당시 공주고등학교 교사였던 유승광씨가 조선왕조실록에서 ‘마량진에서 책을 받았다’는 기록을 보고 이 책이 성경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서천군의 발 빠른 노력으로 이러한 사실이 충남도청과 문화체육관광부에 공식 브리핑되었고, 마침내 ‘서천 마량진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사업위원회’가 조직되어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언더우드의 입국은 부활절 아침이 …

1885. 4. 5. 오후 3시 제물포에 입국

언더우드의 입국은 부활절 아침이 아닌 오후

좌로부터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한국 가톨릭교회는 기독교회(개신교)보다 100년 앞선다. 최초의 선교사는 1884. 9. 20.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명 안연(安連), 1858~1932) 선교사를 비롯하여 다음 해인 1885년 4월 5일에 미국 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와 감리교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선교사가 입국했다. 알렌은 평신도 의료 선교사였다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사 신분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선교사 입국은 알렌 중심이 된다. 그러나 최초의 목사 선교사 입국은 언더우드 선교사 중심이다. 최초의 목사 선교사는 1885.4.5.에 입국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이다. 1885.4.5.은 부활절이었다. 제물포항에 도착한 두 선교사 중 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아펜젤러 선교사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지 못하지 못하고 호텔에서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1884.12.4.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개화파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으며,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 공사관의 대리 공사인 폴크(George C. Foulk 福久 1856~1893)는 당시 임신 중인 아펜젤러 선교사의 부인의 입국이 위험하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한국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해 6월에 다시 제물포에 도착하여 7월 29일에야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제물포 호텔에 머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선교편지로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에 보냈다. 미국 북감리회 해외 선교 보고서(Annual Report)에 전문이 실리게 되었다. 아펜젤러 선교 편지 말미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신 구세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라고 적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1884. 4. 5.이 부활절임을 알려준다. 두 선교사가 제물포에 닻을 내린 것이 오후 3시였으므로 육지에 오른 것은 3시-4시로 추정할 수 있다. 두 선교사가 부활절 아침에 입국한 것이 아니라 오후에 입국하였으므로 “부활절 아침에 입국하였다”라는 말은 맞지 않다. 한국의 최초의 선교는 1884. 8. 8. 20.에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알렌이 한국 선교사로 발령을 받고 입국한 날이 최초의 선교사 입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목사 선교사의 최초 입국은 알렌이 아니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한 1885. 4. 5. 일이다.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와 함께 입국하였지만 제물포 호텔에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1885. 4. 5. 입국한 최초의 선교 목사는 언더우드라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이었으므로 곧바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임신한 아내와 함께 입국한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그해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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