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뉴스목록
-
[왕하 강해 13] 유다 요아스 왕의 성전수리와 실책-암살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11장 말씀을 통하여 “유다왕조의 씨를 진멸하려는 아달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남쪽 유다 왕인 아하시야가 죽게 되자 그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그의 손자들을 다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아달랴는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합왕의 아내가 이세별이었다면 아달랴는 이세별의 딸이기도 합니다. 악한 이세별의 딸인 아달랴가 정통성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열인 유다왕국을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무려 6년 동안 아달랴가 남쪽 유다를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달랴가 손자들을 다 죽일 때 요아스는 성전에 숨겨져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일곱 살 되는 해에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가 경비대장들과 함께 아달랴를 죽이고 정통성 있는 왕족인 유다 나라의 요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파괴하려고 했던 아달랴는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합니다.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1. 요아스가 40년 동안 남쪽 유다 예루살렘을 치리합니다(1-3절). 본문 1절을 보시겠습니다. “예후의 제칠 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고 합니다. 요아스의 할머니인 아달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 이후 요아스가 유다 나라 왕이 됩니다. 40년 동안 치리했습니다. 그는 대체로 정직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나라는 다스렸지만 산당은 제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라고 합니다. 제사장 여호야디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은 요아스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놓은 실수를 범합니다. 3절에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진행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백성은 왕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버립니다. 대신 바알신을 자신의 주님으로 섬깁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을 징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 육신적인 세력을 남겨 놓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육신적인 세력들이 성장합니다. 나중에 그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생각과 사고방식에 오히려 점령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한 두 번 빠집니다. 그러다가 빠지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이제는 아예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협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과감하게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산당은 제거하지를 못한 실수를 범하여 이 문제로 백성이 우상에서 제사를 지내는 불행한 모습이 그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2.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에게 백성이 드리는 은으로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4-8절). 요아스 왕은 각 제사장에게 백성들이 낸 은으로 여호와의 전인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왕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본문 4절에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이라고 합니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예물로 바친 모든 은, 곧 각 사람이 세금으로 바친 은과 각 사람이 약속하여 바친 은과 스스로 원해서 바친 은을 받아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제사장마다 그가 섬기는 백성들에게 은을 받아서 성전을 수리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수리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성전의 기능은 이렇게 중요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과 같은 중요한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이 깨끗하고 수리돼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백성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낸 은으로 그 성전을 수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5절).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들이 그 성전을 수리하지 않습니다. 수리할 부분이 없어서 수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수리할 부분이 많이 있는데도 수리하지 않습니다(6절). 이때 요아스 왕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를 부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이십삼 년째가 되었는데도 제사장들은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7절에 이렇게 명령합니다.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성전에 드리는 은으로 제사장들이 명령대로 성전을 수리하는데 지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제사장들이 받아 관리했던 은을 오직 성전 수리하는데만 사용하도록 백성들이 직접 성전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3. 왕의 명령대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성전을 수리합니다(9-16절). 백성들이 성전에 직접 낸 은으로 성전 수리하는 비용으로 지출하는 말씀입니다. 10절에 보면 궤 안에 돈이 가득 차면 왕의 신하와 대제사장이 와서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온 돈을 계산하고 그 돈을 자루에 담았습니다. 11절에 돈 계산이 끝난 뒤에는 그 돈을 성전 공사를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일하는 목수와 돌 쌓는 사람들의 품삯으로 쓰게 했습니다. 온전히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는 특별 재원이었습니다. 이제 그 돈으로 미장이와 석수들에게 품삯을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나무와 돌을 사들이는 데에도 썼습니다. 그 밖에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 드는 모든 비용에도 그 돈을 사용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성전에 드린 은을 다른 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전 수리하는 비용에만 사용되었습니다(13-14절). 너무나 오랫동안 성전을 수리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성전 수리하는데 비용을 사용하지 않고 성전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성전이 방치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곳은 어떤 공간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한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그것은 오직 제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전이 수리를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불순종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요아스 왕은 성전 기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전을 수리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성전 그 자체가 무너져 있다면 그 성전 안에 제아무리 좋은 기물을 만들어 놓는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아스 왕은 무너진 성전을 수리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남쪽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너진 상전을 증축하고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 공사는 이방인들로 인하여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중단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위로하는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와서도 그 성전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수리한다는 것은 요아스의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이같은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성전을 수리하기 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은을 모았듯이 우리도 성전을 짓고 수리하기 위한 헌금합시다”라는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을 그대로 오늘날 예배당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 성전은 오늘날 적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적용해야 합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곧 자기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제 신자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고전3:17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고후 13: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성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즉 성령이 우리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 거룩하심을 훼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침략해 온 아람 왕 하사엘에게 성물을 주어 돌려보냅니다(17~18절) . 요아스 왕 때 아람 왕이었던 하사엘이 침략해 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방 대적이 침략해 왔습니다(17절). 이런 상황이라면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들을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태도를 보십시오. 18절에 보면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라고 합니다. 유다 왕 요아스가 자기 선대의 유다 왕들인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거룩하게 바친 모든 성물들과 자기가 바친 성물들, 그리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 창고와 왕궁에 있는 모든 금을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루살렘에서 물러갔다. 요아스 왕은 선조들이 구별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린 성물과 금을 취하여 하사엘에게 뇌물로 줍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뇌물로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뇌물이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왕의 발상이나 그런 뇌물을 받고 물러가는 하사엘이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께 원치 않는 일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심판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결정하고 기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편법으로 일을 진행할 때 처음에는 제법 그런대로 잘 풀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일이 잘 진행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기 치지 않고 편법으로 하지 않으면 무슨 사업이 됩니까”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원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5. 요아스가 암살당하여 죽고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19-21절). 요아스 역시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라고 합니다. 요아스는 비참에게 남쪽 유다 열왕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그가 어렵게 왕이 되긴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왕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잘못한 행위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남 왕조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치리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습니다. 요아스가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묻혔습니다. 저는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역대하 24:25에 의하면 요아스가 다윗성에 장사 되긴 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죽자 아들 아마샤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죽었지만, 그의 아들 아마샤가 남 왕조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진행됩니다. 교훈과 적용 아하스는 남 왕국 왕으로 심복에게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을 수리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성전 수리는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가 드려지기 위한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전의 금은보화를 이방 왕에게 뇌물로 바치는 불법을 범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긴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요아스 왕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제사와 제물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사자를 살리기 위해 대리자의 희생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에서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그는 어린양의 제물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 열왕기하 12장에서도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순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왕하 강해 12] 유다 왕조의 자손을 진멸하려는 아달랴지난 시간의 말씀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10장 말씀을 통하여 “예언대로 아합의 집을 심판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북 왕국에 예후를 세워 하나님의 예언대로 심판 사역을 진행해 가십니다. 예후가 등장하여 북 왕국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죽입니다. 또한 요람과 함께 범죄의 길로 갔던 남 왕국 아하시야도 죽입니다. 북 왕조의 아합왕의 범죄 때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해 주신대로 그 아합의 가정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10장에서 살펴본 바입니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아합의 일가친척들도 다 멸망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충실한 종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말씀에 충실하지 않고 범죄한 자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은 가하실 때 그 기준은 언약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거부한 자들이나 듣기는 듣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주어질 것입니다. 1. 유다의 아하시야가 죽은 후 그의 모친 아달랴가 통치를 합니다(1-13절) 이제 역사적인 상황과 배경은 다시 남 왕국 유다로 넘어왔습니다. 유다 왕조의 족보는 여호람의 왕에서 그의 아들 아하시야에게로 넘어왔습니다. ‘여호람’과 그의 아들 ‘아하시야’시대에 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라고 했습니다(왕하8:18,27). 그런데도 그 남쪽 유다(창49:10)와 다윗과(왕하8:19) 맺은 언약 때문에 그 유다를 멸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다 족속을 통하여 왕위가 계속 계승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남 왕조의 왕인 ‘여호람’이 죽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아달랴’였습니다. 여호람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께 범죄 하자 북왕조의 ‘예후’왕을 통해 그를 심판하였습니다. 그의 모친이었던 아달랴가 유다왕조(참고 유다왕조 : 다윗-솔로몬(왕상1:47) - 르호보암(왕상11:43) - 아비얌(왕상14:31) - 아사(왕상15:8) - 여호사밧(왕상15:24) - 여호람(왕상22:50) - 아하시야(왕하8:24) - 요아스(왕하11:21)의 정권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아달랴는 어떤 여인입니까? 아달랴는 쿠데타로 북 왕조의 왕이 되었던 오므리왕의 손녀입니다(왕하8:26). 오므리왕의 아들이 아합왕이었기에 오므리의 손녀라고 하면 아합의 딸입니다.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람왕이 북 왕조(참고 북 왕조; 여로보암(왕상14:20) - 나답(왕상14:20) - 바아사(왕상15:28) - 엘라(왕상16:6) - 시므리(왕상16:10) - 오므리(왕상16:16) - 아합(왕상16:29) - 아하시야(왕상22:40, 아합의 아들) - 여호람(요람)(왕하3:1, 아합의 아들) - 예후(왕하9:13)의 아합왕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입니다(왕하 8:18). 아달랴는 북 왕조 아하시야의 모친인 셈입니다(왕하11:1). 남 왕조는 한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북 왕조는 그렇지 않습니다(위 북 왕조의 족보에서 밑줄 친 부분은 서로 다른 혈통, 즉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것을 말함, 그러나 남 유다는 한 혈통임). 북쪽 이스라엘은 모반과 쿠데타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난 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왕의 혈통이 유다 족속으로 한정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와서 남쪽 유다 왕인 아하시야가 죽게 되자 의 모친 아달랴가 정권을 잡으려고 합니다. 아달랴는 북 왕조의 아합의 딸입니다. 아합의 아내, 즉 아달랴의 모친은 이세벨입니다. 이세벨이 얼마나 악했으며 피를 보았습니까? 그 딸도 남쪽 유다 왕조로 시집와서 자기가 왕권을 잡으려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습니까? 본문 11:1절에 “왕의 자손을 진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남쪽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 줄기입니다. 그 왕통의 씨를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쪽 유다 왕통을 북 왕조의 아합의 딸이 제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장난입니다. 아달랴가 유다 왕통을 진멸하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은 중단되는 법이 없습니다. 아달랴의 피의 숙청 속에서도 아하시야의 아들인 요아스를 그의 누나가 숨겨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메시아의 계열의 족보를 중단시키지 않겠다는 섭리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가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2. 아달랴의 숙청 속에서도 요아스를 숨겨 왕으로 세워 유다 왕의 자손을 잇게 합니다(4-12절)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3절). 이제 하나님의 때가 차매 본문 4절에 보면 7년 만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대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제사장이 왕의 경호대장과 왕궁의 경비대장을 성전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제사장은 그들과 아달랴를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성전에서 그들로 맹세케 했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그동안 6년 동안 숨겨났던 왕자인 요아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달랴를 제거하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이 진행됩니다. 호위병의 일부는 아달랴를 지키게 하고 일부는 성전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래 놓고 그 성전 안에서 제사장인 여호야다는 요아스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왕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하신 약속이 7년 만에 재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중단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실패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근 6년 동안의 기간은 북 왕조의 아합의 딸인 아달랴를 심판하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탄 마귀가 장난하고 방해한다고 해도 실패하지 않고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한다거나 낙심하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은 실패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사탄 마귀는 자신들이 승리한 줄 착각하여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순간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심판의 절정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절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좌절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나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서 지금 우리를 감찰하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백성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 충성하며 바르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아달랴를 성전 밖에서 죽입니다(13-16절) 성전 안에서는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하시야를 이어 요아스가 유다의 왕위에 오르는 행사 때문입니다. 만세 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것을 호위병에 의해서 갇혀 있는 아달랴가 듣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가서 그 광경을 보게 됩니다. 다같이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매 왕이 규례대로 단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셔 섰으며 온 백성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자신이 유다의 왕인데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장면을 본 아달랴는 그들이 반역하고 있다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어느 호위병도 그의 편이 되어 주지 못합니다. 이미 제사장과 다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인 여호야다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달랴 자신이 반역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누가 그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습니까? 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쿠데타로 스스로 왕이 되었을 뿐입니다. 아달랴의 친아버지 ‘오므리’는 북왕조의 ‘시므리’ 왕을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북 왕국의 왕이 된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런 집안에서 남 왕국의 왕의 집안으로 시집와서 자신도 남 왕국을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호위병에게 성전에서 그를 죽이지 말고 성전 밖으로 끌고 가 죽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만약에 그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죽이라고 합니다. 다같이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의 길을 열어주매 그가 왕궁의 말이 다니는 길로 가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 부정한 한 여인, 권력에 눈이 어두운 여인, 사탄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그 여인이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죽을 몸, 무엇이 그렇게도 대단하다고 죄를 짓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 잘 섬기며 살다가 우리 주님이 부르시는 날 잘했다고 칭찬 듣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요아스가 7세에 왕이 되고 유타왕조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17-21절)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남쪽 유다의 왕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신이 마치 왕이 됩니다. 마치 아달랴와 같은 여인입니다. 아달랴라는 그 여인은 그의 어머니 이세벨과 함께 피를 많이 부른 여인입니다. 우리의 옛말에 딸을 보려면 그 어머니를 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배우며 자랐겠습니까? 교육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17절에서는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에게 여호와와 언약을 맺어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백성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18절을 보겠습니다. “온 백성이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그 신당을 허물고 그 제단들과 우상들을 철저히 깨뜨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을 수직하게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진행됩니다. 모든 우상 단지를 제거합니다. 바알의 제사장을 죽입니다. 회개의 운동입니다. 드디어 나라가 평화가 임했습니다. 온 국민은 즐거워했습니다. 2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더라.” 누구는 좋아하는데 누구는 죽습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자가 심판을 받고 어떤 자가 영생을 소유합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1절에 보시면 “요아스가 왕이 될 나이가 칠 세였더라”고 합니다. 6년 동안 아달랴의 왕족에 대한 피의 숙청으로 성전에서 숨어 지낸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 7세였다고 한다면 그 요이스의 부왕인 아하시야가 요아스를 낳자 마자 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유다 왕통을 이을 수 있도록 아들을 출산할 때까지 살려주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까? 그 하나님께 순종하시며 헌신하시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훈과 적용 구약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창세기에서 약속해 주신대로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유다를 통해서 이어집니다. 유다 지파를 통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구약성경은 그 성취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유다 왕조의 자손을 진멸하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중단시키고자 하는 전형적인 사탄의 장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의 뜻대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궁극적으로 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북 왕국, 예언대로 아합의 집을 심판하신 하나님왕하 10:1-36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9:1-37절 말씀을 통하여 “예후를 세워 북왕조 요람을 심판하신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말씀대로 북 왕조의 요람을 심판하셨습니다. 요람을 심판하시고 이세벨을 심판하신 모습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요람과 이세벨은 아합의 집안사람입니다. 요람은 아합의 아들이요,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합의 집이 심판당한다는 하나님의 예언으로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조상, 즉 부모 때문에 심판받았습니다. 그러나 심판받은 당사자 중의 한 사람인 요람 역시 심판받는 집안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외면하고 범죄의 길로 갑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심판받아 마땅한 자녀들처럼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것을 말씀합니다. 잘 섬긴다는 것은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의 생활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1. 아합의 후손을 다 죽입니다(1-11절). 하나님께서는 이미 열왕기상 21:20-22절에서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이 이미 9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열왕기상 21:20-22절을 말씀을 살펴본 다음에 본문을 살펴보시겠습니다. 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21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아합이 자기를 찾아온 엘리야에게 “이 원수, 네가 또 나를 찾아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때 엘리야가 겁에 질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찾아온 까닭은 왕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구체적으로 재앙을 내린다고 말씀합니다. 아합왕뿐만 아니라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네 집안의 남자란 남자는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본문 열왕기하 10:10절 말씀과 연결해 보겠습니다. 다같이 10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이미 아합의 집이 멸할 것을 예언하셨는데 “이제 이루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예후가 이미 남 왕국 왕인 아하시야와 북왕국 왕인 요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북쪽 이스라엘에 모든 사람은 예후를 두려워하였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 왕이 그를 당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예후가 이스라엘의 모든 장군과 아합의 후손들을 잘 받들어 섬기고 있는 고위직에 몸담은 관료들에게 싸우자고 할 때 그들이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운 나머지 그들이 사람을 시켜 예후에게 보냈습니다. 무슨 말을 전달하고 있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 “왕궁 관리와 성의 지도자와 장로와 아합의 아들을 보호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후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왕으로 세우지 않겠습니다. 당신 마음에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이 말은 예후에게 항복한다는 말입니다. 첫째, 이제 그들이 예후에게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후 외에는 다른 왕을 세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제 명령만 내리면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있던 예후는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 내용이 6절 말씀입니다. “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 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편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예후가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립니다. 아합의 후손 70명을 모두 죽여 머리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후의 말대로 그들을 죽여 머리를 가져왔습니다(8절). 이 머리를 성문 앞에 두 무더기로 쌓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예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합의 후손이 이렇게 멸망 당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이제 이루셨도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히 엘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성취되었습니다. 신명기 18:22절에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예언은 분명히 성취되었습니다. 엘리야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 아니라 참 예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도 그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의심하면 안 됩니다. 믿고 의지하고 구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됨을 거부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들 못지않게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회개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런 원리에 따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감사해야 합니다. 2. 남쪽 유다 왕이었던 아하시야의 형제들도 죽입니다(12-14) 예후가 이스르엘에서 아합의 후손들을 다 죽이고 다시 사마리아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남쪽 유다의 아하시야왕의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미 예후는 아하시야 왕을 죽였습니다. 그 왕의 형제들을 만나 묻습니다. 13절에 “예후가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라고 합니다. 예후는 아합의 후손들을 여호와 예언의 말씀대로 다 죽이고 돌아가는 도중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합의 후손들인 이세벨과 왕자들과 아합왕의 친척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예후 왕은 그들을 웅덩이 곁에서 죽였습니다. 죽은 자들이 무려 42명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 편에 서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그들이 비록 남쪽 유다의 아하시야 왕들의 형제들이라도 별수가 없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의 언약 계열로 인정받은 남쪽 유다 백성들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과 한 편이 된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즉 소속의 신분이 문제입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 백성의 신분이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소속된 신분을 소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20절에서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는 이 세상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되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3. 아합에게 속한 나머지 친척들을 진멸합니다(15-17절) 계속해서 예후의 발걸음은 사마리아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는 도중에 또 여호와께 충성한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나답이 먼저 예후를 만나러 왔습니다.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네가 나를 믿고 찾아온 것처럼 내가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라고 말하자 예후는 여호나답을 자신의 병거로 끌어올려 함께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아합에게 속한 모든 친척들을 진멸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17절애 보면 “사마리아에 이르러 거기에 남아 있는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죽여 진멸하였으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렇게 되리라는 말씀대로였습니다. 4. 바알 선지자와 숭배자들을 진멸합니다(18-29절) 예후는 지금까지 아합의 집을 다 진멸하였습니다. 이제 눈을 돌립니다. 어디로 돌리느냐면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과 바알의 선지자들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후가 무참하게 아합의 집을 진멸시킬 때 많은 사람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예후는 일을 꾸밉니다. 거짓말을 하여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을 다 모이게 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지만, 자신은 많이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알에게 큰 제사를 지내려고 하니 모든 바알의 선지자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은 다 자신 앞에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인 그들을 모두 다 처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에 나오지 않는 자들은 다 죽일 것이라고 공포합니다. 이렇게 하여 모든 바알의 선지자들과 숭배자들이 예후 앞에 모였습니다. 다같이 23절을 읽으시겠습니다.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더불어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여기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만이 따로 모이게 하여 그들만을 구별하기 위하여 예복을 입힙니다. 그들이 바알을 섬기려 바알의 당에 들어갈 때 예후는 밖에 80명을 대기시킵니다. 그 80명에게 한 사람도 살려주지 말고 죽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라도 도망가게 했을 때 그 사람은 죽을 것을 말합니다.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 비참하게 죽는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본문 25-27절 말씀입니다.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지휘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지휘관들이 칼로 그들을 죽여 밖에 던지고 바알의 신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런 무서운 심판은 장차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심판하실 심판의 모습입니다.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마치 바알 숭배자들이 예후에 의해서 몰살당했던 것처럼 그렇게 당하고야 말 것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처단했던 예후의 행위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28-29절 말씀입니다.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씀을 이렇게 한번 적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예배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나 첩을 거느리고 살았다.’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 봉사는 잘하였으나 부모를 버렸고 남편과 이혼했다.’ 이 또한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이런 행위는 결국 자신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지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마치 예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까? 5. 예후의 통치와 죽음 (30-36절) 첫째 예후의 선과 악입니다(30-31절). 하나님께서 예후를 북왕조의 왕으로 세운 것은 아합의 집에 내리기로 하신 심판을 대신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합의 집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자로 예후를 선택했습니다. 즉 하나님 공의의 속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후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잘 감당합니다. 30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예후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잘 수행했기에 예후의 자손이 4대까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 이후는 허락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31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예후이라도 열외가 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둘째, 북 왕조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32-36절). 예후가 통치한 그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영토가 대적에게 조금씩 침략당해 빼앗기게 하는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람의 하사엘로 하여금 북쪽 이스라엘을 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심판의 예언에 대한 성취였습니다. 열왕기상 19:17절에서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후가 결국 죽습니다. 전혀 죽지 않고 영원토록 권력을 누릴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이 세상을 떠난 가련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28년 동안 다스린 후에 죽게 되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됩니다. 예후의 자손 4대까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은 구약 성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 앞에 살아남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의 역사와 북쪽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를 통해서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역사를 거룩한 역사, 구원의 역사. 계시의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회개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본분입니다.
-
[왕하 강해 10] 북 왕조, 예후를 세워 북 왕조를 심판하신 하나님지난 시간의 말씀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8:16-29절 말씀을 통하여 “악을 행하였으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남쪽 유다왕인 여호람이 북쪽 이스라엘의 악한 왕과 같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북 왕조의 왕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심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북 왕조의 왕과 같이 남쪽 유다 왕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이었던 여호람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가 선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상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남 왕국 여호람 왕은 죽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남쪽 유다의 왕이 됩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하시야 왕 역시 가장 악했던 북 왕조의 아합과 같이 악을 행합니다. 그러나 아하시야 역시 죽습니다. 그런 왕들의 죄악의 길에서도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유다 지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께 보호하십니다. 도와주실 것입니다.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1. 예후가 요람을 이어 북 왕조의 왕이 됩니다 (1-13) 이미 8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위해서 엘리사로 하여금 하사엘에게 아람의 왕이 될 것을 말씀하시고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9장에서는 똑같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위해서 예후를 기름 부어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열왕기상 19:17절에서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라고 예언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심판 예언은 열왕기하 9장에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심판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집을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심판의 말씀이 7-10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7-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이 말씀은 아합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목적을 이야기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왕으로 세워 아합의 집을 심판하셨습니다. 예후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도판의 도구로 사용될 때 예후는 늘 하나님의 무서움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사실 10장에 보면 그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어 살다가 하나님의 그 무서운 심판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에 의해 쓰임을 받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임을 받은 후에 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기로 약속하신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그것이 심판을 위해서든 구원을 위해서든) 쓰임을 받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바울 사도께서 말씀한 “나를 쳐 복종케”하여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내 마음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께 묻고 처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북 왕조인 이스라엘 왕 요람(여호람)과 남 왕국 유다 왕 아하시야가 죽습니다 (14-29). 북 왕조의 요람왕이 결국 죽습니다. 이 요람왕을 ‘여호람’이라고도 합니다(왕하1:17). 그러나 같은 시대 남쪽 유다의 왕인 ‘여호람’도(왕상22:50, 왕하1:17)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북 왕국과 남 왕국이라는 서로 다른 나라입니다. 또한 북 왕조의 아합의 아들이었던 아하시야 왕과(왕상22:40) 남쪽 유다 왕 아하시야(왕하8:25)도 있습니다. 혼동하면 안 됩니다. 북 왕조 요람이 예후에 의해 어떻게 죽는지를 살펴보시겠습니다(14-26). 첫째, 예후가 요람왕을 배반하여 추격합니다(14-16). 이미 8장에서 우리는 남쪽 유다 여호람왕의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쪽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요람)과 함께 아람 왕 하사엘 왕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북쪽 요람은 오히려 상처를 입고 쫓겨왔습니다. 거기에는 유다왕인 아하시야도 있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북 왕조의 요람은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합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 악한 왕이었던 아합과 그 집이 멸망을 받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제 그 아합의 아들인 요람 역시 멸망의 막다른 길에 놓여 있습니다. 이 요람은 북쪽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을 때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했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많은 능력과 기적을 요람은 목격했고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그 요람을 심판하기에 앞서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요람이 왕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인 예후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요람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비참합니까? 여전히 요람은 자신이 왕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왕은 예후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배반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보통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아무개에게 배신당해서 망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배신당할 때 나의 죄가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예후의 추격을 파수꾼이 요람에게 보고합니다(17-20). 배신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제 침략당합니다. 이방 대적에게 침입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동족인 사람들에게 침략받게 만듭니다.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르엘 망대에 파수꾼 하나가 서 있더니 예후의 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하니 요람이 이르되 한 사람을 말에 태워 보내어 맞이하여 평안하냐 묻게 하라 하는지라.” 그러나 미리 사람을 예후에게 보내 맞이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은혜를 받고 용서를 받은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이 땅에 어떤 은혜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이런 은혜의 복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셋째, 예후가 요람을 죽여 시체를 밭에 던지라고 합니다(21-26). 21절에 “요람이 이르되 메우라 하매 그의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의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라고 합니다. 여기 ‘메우라’라는 말은 병거를 탈 수 있도록 필요한 제반 준비를 갖춘다는 말입니다. 도망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후에 의해서 죽습니다. 24절에 기록됩니다.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겨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화살이 그의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그가 병거 가운데에 엎드러진지라.” 이렇게 해서 죽지만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한 대로였습니다(25절). 이렇게 하여 북쪽 이스라엘의 요람이 예후에 의해서 죽습니다. 북 왕조의 요람이 죽은 후에 남 왕조 아하시야도 죽습니다(27-29). 본문 27절에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고 했습니다. 요람이 죽는 것을 남쪽 유다 왕이었던 아하시야가 보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예후가 쫓아가서 그 역시 죽입니다. 이것 역시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남쪽 유다의 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라를 치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 왕국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다 지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그런 유다 왕국의 왕이었던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죄악의 길로 가던 북 왕조 요람과 함께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하시야 역시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수행하고 있던 예후에 의해서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세상과 함께하며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신앙과 다름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기도하고 찬송하며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복이 임합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죄짓고 원망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같이 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3. 이세벨도 심판받아 죽습니다 (30-37)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내였습니다. 바알과 거짓 선지자들의 대모였습니다. 열왕기상 16:31절에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세벨의 남편에 대한 평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다같이 본문 30,3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과거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거짓 선지자를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다 죽일 때 엘리야에게 그토록 당돌했던 그 이세벨이었습니다. 여기서도 자신의 아들 요람을 죽인 예후에게 당돌하게 나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곧 죽는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언제나 권력자들은 그래 왔습니다. 예후는 “내 편이 될 자가 누그냐”고 소리쳤습니다(32절). 그러나 이세벨을 좋지 않게 여기던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예후가 그들에게 이세벨을 창문에서 아래로 던지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33절에 기록되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예후가 “이 저주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라고 합니다(34절). 그러나 35절에 보면 이세벨의 시체 가운데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고 합니다. 이세벨의 시체 중에 몇 부분 이외에는 찾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36절에서 말해 줍니다.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개들이 이세벨의 시체를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열왕기상 21:23절에서 이미 예언했습니다. 왕상 21:23절에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비참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조롱했던 자들에게 이런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비참한 말로입니다. 교훈과 적용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됨됨이를 배우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역사와 인물들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뜻대로 이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항하고 범죄 했던 자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무너지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와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섭리하고 계신가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역사는 우연의 역사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
[왕하 강해 9] 남 왕국, 악을 행하였으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남 왕국] 악을 행하였으나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본문 / 왕하 8:16-29) 지난 시간의 말씀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8:1-15절 말씀을 통하여 “아람의 하사엘을 왕으로 세운 엘리사”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아람은 이방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 엘리사로 하여금 하사엘이 왕이 된다는 것을 예언합니다. 이처럼 아람 왕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벤하닷 왕을 심판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종 엘리사와 이스라엘의 왕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포위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는 이제 벤하닷 보다 더 악한 왕인 하사엘을 왕으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심판에 관한 예언은 이미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에게 약속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 이방 나라 왕을 세워 심판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변함없이 들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할 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악한 자들을 세워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1. 유다 왕 여호람이 아합과 같이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16-19절). 열왕기하 8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절에서부터 15절까지는 북쪽 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다음 16절에서부터 29절 말씀까지는 남쪽 유다에 관한 기록입니다. 본문 16절에 “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 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고 합니다. 그 여호람은 32세에 왕이 되어 8년 동안 예루살렘을 처리하였습니다(17절). 그런데 그 남쪽 유다의 여호람 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다 같이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람 왕은 첫째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한 이스라엘이란 북 왕조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북 왕조의 모든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들이었습니다. 그 북 왕조의 왕들 가운데 아합왕은 특히 악했습니다. 그런 아합왕과 같은 악한 길을 따랐습니다. 둘째로 정략적으로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유다의 여호람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했습니다. 그런 악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절에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18절과 19절 사이에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18절의 결론은 여호람 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악을 행했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이 19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북 왕조의 왕은 그들의 죄악대로 멸망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남쪽 유다 왕도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과 똑같이 죄를 지었다면 그들 역시 심판과 멸망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멸망과 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다윗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유다의 후손이 다윗을 멸망시키지 않기로 이미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유다 지파인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장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 구원의 섭리는 유다 지파를 통하여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북 왕조와 똑같이 남 왕조의 여호람이 범죄 했을지라도 그를 심판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열왕기하를 기록하는 기록자는 북쪽 이스라엘의 범죄 행위를 지적하면서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음을 언급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에게 엘리사의 기적과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에 순종했던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모든 백성에게 여전히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이제 16절에서부터는 상황이 남쪽 유다에게로 옵니다. 남쪽 유다 역시 북쪽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는 범죄의 길을 갔다는 것이 열왕기서가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핵심입니다. 남쪽 유다가 북쪽 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이 죄를 범했다면 유다왕국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심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이 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임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불신자들과 똑같은 죄를 범합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범한 죄 때문에 심판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심판받은 불신자들과 똑같은 죄를 범했다면 그들과 같이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불신자들과 똑같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우리들의 죄는 용서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역시 똑같이 죄를 범해서 심판과 멸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그 죄악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5:11~12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아멘. 이 사실을 믿습니까? 2. 여호람이 에돔을 쳤으나 패한 후 죽고 아들 아하시아가 왕이 됩니다(20-24절).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전쟁과 평화는 물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위해서 죽이기도 하시고 구원하시기도 합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역사는 그 역사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여호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죄를 범했습니다. 죄를 범한 자들의 행위를 따랐습니다. 이런 가운데 유다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에돔이 이제 더 이상 유다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동안 에돔이 유다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당시 유다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짐작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강한 민족이 되게 하셔서 이방 나라를 다스리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여호람 왕 때 그 질서가 무너집니다. 에돔이 유다를 벗어나려고 유다를 대항할 수 있는 다른 왕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일로 유다의 여호람 왕이 에돔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맙니다. 다 같이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에돔을 쳤으나 오히려 에돔에 포위당하고 맙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우리가 계속 하나님께 범죄할 때 범사의 일이 결코 형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여호람은 다윗과 유다 지파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때문에 결국은 구원받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시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범사를 간섭합니다.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에돔에게 배반당하게 합니다. 또한 배반한 에돔을 치러 갔으나 오히려 화를 당하도록 해 버립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성립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행위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지나 않습니까? 그런 어려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일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손해만 끼치는 사람들을 내 주위에 포진시키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내 주변에는 사기 친 사람들을 많이 포진해서 나로 손해를 보게 하신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들의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더 큰 매를 맞을 것입니다. 나중에 울고불고하지 마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회개는 목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장로님도 집사님도 권사님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열외 될 수 없습니다. 마치 자신은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남 왕조의 여호람 왕은 죽습니다. 그 아들 아하시아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습니다(24절).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그 어떠한 영웅호걸도 다 이 세상을 떴습니다. 남쪽 유다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여호람도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흔적은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흔적은 이 세상에 남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십니까? 3. 유다 아하시아 왕이 북 왕조 아합의 길로 행합니다(25-29절). 남쪽 유다 왕이 여호람에서 그의 아들 아하시아로 이어집니다. 아하시아가 22살에 왕이 되어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겨우 1년 동안 치리 하게 됩니다. 아하시아가 왕으로 있을 때 북 왕조의 왕인 요람이 12년째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아하시아의 부왕인 여호람은 북 왕조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호람의 아들인 아히시아의 어머니는 아합의 딸인 셈입니다. 당시 북 왕조는 하나님의 언약 계열에 벗어나 하나님 앞에 범죄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남 왕조의 아하시아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북 왕조와 가까이 보내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하시아는 아합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하시아는 하나님을 외면했던 북 왕조와 같은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악행을 범했던 아합의 못된 행위를 본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외면하게 됩니다. 교회도 등한시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고후6:14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옛말에 “그 사람을 보려거든 그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빛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어떤 환경 속에 있는지도 잘 살펴야 합니다. 꽃밭에 가 있으면 내 몸에 꽃향기가 몸에 가득합니다. 사랑하고 불평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면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사랑하고 겸손한 사람들과 함께하면 나도 그렇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예도 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남 왕조의 아하시아가 북 왕조의 영향권에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람왕 하사엘을 새워 북 왕조를 심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하시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요람을 도와 아람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결국 북 왕조의 요람이 아람 군대에 의해서 큰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부상을 당한 요람이 치료차 이스르엘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 남 왕조 아하시아가 방문합니다(29절). 이후 9장에서 보면 이 두 왕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악하게 보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던 북 왕조를 바라본 남 왕조는 하나님 앞에 긴장해야 하고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북 왕조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 반열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 왕조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 반열에 속한 왕조였습니다. 그 남 왕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 왕조는 북 왕조 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불신자들이 죄를 범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각성과 회개는커녕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 합세합니다. 그러면 같이 망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왕하 강해 8] 아람의 하사엘을 북왕국 왕으로 세운 엘리사아람의 하사엘을 북왕국 왕으로 세운 엘리사(왕하 8:1-15) 지난 시간의 말씀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7장 말씀을 통하여 “엘리사의 예언과 아람 군대의 퇴각”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아람 군대는 엘리사의 예언대로 퇴각됩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에 이후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어려움이 오고 하나님의 재앙이 왔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주인으로, 왕으로 섬기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죄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근본적인 죄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 죄로부터 돌이킨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그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1. 수넴 여인의 땅을 찾아 줍니다(1-6절). 우리들은 이미 열왕기하 4:9절에서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엘리사를 영접했던 아름다운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엘리사가 그런 여인에게 자녀가 있을 것을 약속하고 그 약속대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열왕기하 4:35절에서 다시 살려주었던 기적을 우리들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 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주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주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 년 동안 임하리라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7년 동안 기근이 임할 것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근은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한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서 보내신 엘리사를 영접했던 경건한 여인에게는 은혜를 베푸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란 기근의 땅에서 기근이 없는 땅으로 옮겨 주신 일입니다. 엘리사는 그 수넴 여인에게 장차 7년 동안 이 땅에 흉년이 들게 하실 것이니 가족과 함께 이 땅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살다가 7년 흉년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라고 일러줍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은 가족과 함께 7년 동안 불레셋 사람의 땅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땅이 이미 왕의 소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때 수넴 여인은 왕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땅을 돌려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마침 왕에게 호소할 때 엘리사의 기적의 이야기를 왕에게 이야기하고 있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이 수넴 여인을 알아봅니다. 이 여인의 아들도 엘리사가 살려주었다고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명령합니다. 그 명령이 6절 말씀에 기록됩니다. 6절을 보시겠습니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설명한지라 왕이 그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이르되 이 여인에게 속한 모든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 주라 하였더라.” 땅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그 땅에서 수확했던 것까지 계산해서 돌려주라는 왕의 명령이었습니다. 이때 북쪽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람(혹은 요람)왕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두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 즉 하나님께 순종한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자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자 그들에게 흉년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심판과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한 경건한 백성들에게는 그 심판에서 피하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열왕기상 19:18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죄 가운데 모두 심판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칠천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바로 수넴 여인도 이 경건한 하나님의 교회 백성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들은 과연 이같은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해 있습니까? 둘째로, 결국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전답을 그대로 놓고 하나님의 심판의 흉년을 피해 타국으로 갔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농사를 짓지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7년의 수확을 소급해서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면 됩니다. 의지하면 됩니다. 잠언 16:20절에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29:25절에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2. 게하시가 엘리사의 기적을 왕에게 증거합니다(4-5절). 본문 4-5절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그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하며 이르되 너는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설명하라 하니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머니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하니라.” 여기서 말한 왕은 남쪽 유다 왕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 왕입니다. 여호람 왕은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의 아들입니다. 그 아합 왕의 범죄로 인하여 그 가정이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6장에서 아람왕이 이스라엘 왕인 여호람 왕을 죽이려고 국경선 근처에서 매복해 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에 의해서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를 제거하려고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 때문에 암살 당하지 않았던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자객을 보내어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우리들은 이미 6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 왕이 엘리사에 예언으로 아람의 포위망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다시 구원을 받게 되자 엘리사에 관해서 자세히 알기를 원했나 봅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 보시면 “그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하며 이르되 너는 엘리사가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설명하라 하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그 이스라엘에게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 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은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에 더 눈이 어두웠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알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말씀을 증거해 주신 주의 종들에 관해서 무관심합니다. 이런 무관심들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세상 일로 너무나 분주하다 보니 신앙에 관해서, 교회에 관해서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묵상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에게 엘리사에 관한 큰 일을 이야기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큰 일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전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왕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왕에게 전해 주고 싶은 하나님의 의도가 계셨습니다.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고 믿으면 하나님께서 결단코 그들을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굴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모든 자존심은 버려야 합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증거할 수 있는 증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벤하닷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가 이루어집니다(7,15절) 본문 7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왕에게 들리기를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을 방문했습니다. 과거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초대했나 봅니다. 엘리사가 다메섹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아람의 왕인 벤하닷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벤하닷은 병이 들어 있습니다. 아람 왕인 벤하닷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의 능력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엘리사 때문에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던 벤하닷의 계획이 무산되었던 사실을 벤하닷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람왕의 벤하닷에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엘리사로 하여금 많은 능력을 베풀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무시했고 침략하려고 했던 아람왕인 벤하닷이 이제 종말을 맞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을 날이 다가온 것입니다. 벤하닷이 병이 들어 있는 시점에 맞추어 엘리사가 그곳 다메섹을 방문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우연의 일치란 없습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를 지배하신 하나님의 섭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벤하닷을 병으로 치고 계십니다. 다같이 10절을 보시겠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 반드시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엘리사의 예언은 단호합니다. 지금 병은 고침을 받겠지만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그가 어떻게 죽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의 부하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입니다. 아주 비참한 벤하닷의 결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4. 엘리사가 하사엘을 아람왕으로 세웁니다(7-15절) 본문 7-15절 말씀의 핵심은 아람왕의 벤하닷이 죽고 그의 부하 장군인 하사엘이 아람의 왕이 되는 그런 장면입니다. 하사엘이 왕이 된 것은 엘리사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사가 아람 왕의 하사엘을 왕으로 세운 이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열왕기상 19:15-17절 말씀에 기록됩니다. 열왕기상 19:15-1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미 아람의 왕으로 하사엘을 세울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사엘을 왕으로 세우신다고 합니까? 그것은 하사엘이 악한 자가 되어 심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자들에게 하사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열왕기하 8: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사엘이 이르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하는지라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그들의 성에 불을 지르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니.” 이런 이유 때문에 아람의 하사엘이 왕이 될 것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엘리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13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었던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지 않고 범죄할 때 이방 나라의 악한 자를 왕으로 세워 고통을 받게 하십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 심판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백성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를 위해서 엘리사를 통하여 얼마나 기회를 주셨고 은혜와 능력을 베푸셨습니까? 그러나 백성들은 무감각했습니다.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무서운 진노의 재앙이 닥쳐 올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심판은 악한 사람을 통하여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후 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또한 심판의 도구에 의해 내가 심판을 당하였을 때는 없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떠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결국 아수르에 포로로 잡혀가 북왕국이 망했습니다. 열왕기하 저자는 이러한 역사를 바라보면서 그 과정에서 북왕국이 어떻게 하나님께 멀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언약의 백성인 남왕국은 북왕국과 다르게 완전히 죄에서 떠났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남왕국 역시 북왕국과 같이 죄를 범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도 남왕국은 용서를 받았지만, 북왕국은 궁극적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왜 남왕국은 북왕국과 달리 나라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것은 남왕국인 유다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실 구속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구속사로 설명합니다. 유다 지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위해 남왕국을 보호해 주시고 은혜와 자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왕하 강해 7] 엘리사의 예언과 아람군대의 퇴각케 하신 하나님지난 시간의 말씀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6장 말씀을 통하여 “불말과 불병거로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을 암살하려고 군대를 국경 접경 지역에 매복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이 매복한 사실을 왕에게 미리 알려 줌으로 아람 왕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실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 역사를 하나님의 의도대로 주관하십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 왕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그들의 뜻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우리들은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1. 엘리사의 예언과 장관의 불신입니다(1-2절).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은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습니다. 참으로 암담한 현실입니다. 이방 나라 아람과의 전면전이 곧 펼쳐질 것 같은 전운이 감돕니다. 마치 최전선에서 언제 적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런 문제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어려운 문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 문제가 육신의 질병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물질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자녀 문제일 수도 있고 부부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는 우리들을 근심하게 합니다. 고통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그런 문제 앞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확신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걱정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됩니다. 기도는 만사를 해결해 주는 열쇠입니다. 어려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 주는 주의 종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언제나 말씀을 증거하는 주님의 종들을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가 어두운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아람 왕의 포위에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사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그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한 가닥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일 이맘때, 즉 24시간 안에 아람의 포위가 끝날 것을 예언합니다. 또한 포위 기간동안 사마리아 성의 물가는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물가가 정상적으로 회복될 것을 예언합니다. 포위되기 전의 정상적인 상태로 전환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 때 그들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이방 나라의 침략을 받게 했을 때 나라가 어려웠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예언으로 다시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베풀어주셨음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분명히 예언합니다. 본문 1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람왕을 보좌하는 장관은 이같은 엘리사의 예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불신했습니다. 아람 군대가 포위해 있는데 어떻게 무슨 힘으로 포위가 끝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포위되기 이전과 같은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는 불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한 이런 장관처럼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불신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때 이 장관에게 엘리사가 무슨 말을 합니까? 본문 2절 하반절을 보시면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고 예언합니다. 이 말은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볼 수 있겠지만 그는 그같은 하나님의 축복의 현장을 맛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2.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람 군대를 도주하게 하십니다(3-8). 본문 3절에서는 네 명의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병환이 걸렸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밖으로 쫓겨나 격리된 생활을 했습니다. 그 문둥병 넷이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봐야 굶어 죽을 것은 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는 아람 군대의 진지에 투항하자고 했습니다. 적군들에게 투항해서 살려준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고 죽인다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는 생각에 사생결단을 하고 적군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적군으로 들어간 네 명은 참으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있어야 할 적군들은 없었습니다. 다 떠나고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적군들이 다 떠나게 되었는지를 6-7절에서 말씀합니다. 6-7절을 다같이 보시겠습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하나님을 능력을 보십시오. 적군들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보십시오. 천하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십시오. 어떠한 하나님의 소리였기에 그것을 큰 군대의 소리로 듣고 무서워서 아람 군대가 도망갔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을 못하십니까?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아람 군대가 버리고 도망간 자리에서 마음껏 먹고 즐겼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에게도 결국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네 사람은 이 좋은 소식을 왕궁으로 돌아가 전했습니다.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사마리아를 포위해 있던 아람 군대가 도망갔다는 기분 좋은 소식을 왕에게 전했습니다. 이같은 기쁜소식을 전해들은 왕의 첫 마음을 보십시다. 12절입니다. “왕이 밤에 일어나 그의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그들이 우리가 주린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진영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성읍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읍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하니.” 이 말씀은 왕이 아람 군대가 도망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람 왕의 또다른 작전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 작전에 말려들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간곡한 호소에 정찰병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아람 군대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 하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깁시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불신하면 안 됩니다. 3.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됩니다(9-20절). 아람 군대의 포위에서 24시간 안에 풀려나리라고 했던 엘리사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아람 군대가 버리고 간 물건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기에 그 전쟁에서 포획된 노획물들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소유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헌금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말로만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안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은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 없는 신앙,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코 구원에 이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약 2:14). 엘리사의 예언대로 엘리사의 예언을 믿지 못하고 불신했던 장관은 결국 죽고 맙니다. 20절을 보시겠습니다.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 참으로 무서운 심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단하신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뿐만 아니라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입니다. 어떤 자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납니까? 하나님을 거역한자들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훈과 적용 우리들은 지금 옛날 먼 이야기를 소설 읽는 식으로 본문 말씀을 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도전을 받아야 되는 그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안고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어떻게 회개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린 재앙은 하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또한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한 자에 대한 엄한 심판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또한 어려운 문제 앞에서 우리들이 취해야 하는 행동들이 어떠해야 함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불신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은 분명한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다시 한번 회개하고 기도하면 우리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어렵다고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엘리사의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분명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포위해 들어왔던 아람 군대가 하나님에 의해 퇴각(退:물러날 퇴 却:물리칠 각)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리치자 적군들이 물러났습니다. 퇴각되었습니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곧 우리들의 적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적들은 하나님께서 물리치시고 물러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고 담대하게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단 마귀를 물리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물리치십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들의 영원한 승리의 이름입니다.
-
[왕하 강해 6] 불말과 불병거로 함께 하신 하나님불말과 불병거로 함께 하신 하나님 왕하 6:1-33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5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아만이 나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아만의 행위가 거룩했다거나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능력은 이방 대적인 아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해 주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각 시대마다 당신의 종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엘리사로 하여금 각종 이적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엘리사의 이적은 엘리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적이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사환 게하시가 그것을 가로챘을 때 그에게 나병의 재앙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같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서 혹 우리들이 게하시처럼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이 없는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열왕기하 6장 말씀을 통해 “불말과 불병거로 함께 하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엘리사가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이적을 보여줍니다(1-7절) 하나님께서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이적을 베풀게 합니다. 그 이적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었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이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런 능력을 보여주십니까? 그 능력을 인간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보여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 1, 2절을 보시겠습니다. “1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2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가라 하는지라.” 그때 엘리사가 말하기를 ‘가라’고 합니다. 그때 선지생도들이 엘리사에게 함께 가자고 간청합니다. 엘리사는 ‘내가 가리라’고 하면서 함께 요단 요단 강가로 갔습니다. 그 때 한 제자가 도끼로 나무를 베다가 그만 도끼가 도끼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자들도 걱정했습니다. 이 도끼는 자신들의 도끼도 아니었습니다. 이 도끼는 이웃에게서 빌어 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선 엘리사는 아무런 근심과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침착하게 “어디 빠졌느냐”라고 묻습니다. 빠진 곳에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뻬어 그곳에 던지자 도끼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지켜보고 있던 제자가 그 도끼를 꺼냈습니다. 우리들은 이같은 이적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의심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엘리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 많으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여러번에 걸쳐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이적을 보아 왔습니다. 이런 이적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확실한 징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적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굴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은총을 입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복을 받지 못하고 이방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헌신봉사해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 아람왕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로 인하여 고민합니다(8-13절) 8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의 왕을 암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국경선 근처 자기 군인들을 매복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그 매복 장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을 죽이는데 매번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람 왕의 태도를 보십시오. 11절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이 말은 우리 중에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반역자가 있기 때문에 번번이 매복 장소가 드러난 것이 아니냐고 호통쳤습니다. 그러나 그 부하 지휘관들은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한 신복이 말하기를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가 있는데 그는 왕이 침실에서는 하는 말까지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일러바친다고 말해 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람 왕은 엘리사를 체포하라는 체포 명령을 내립니다. 누구 맘대로 체포합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그렇게 쉽게 체포됩니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들 주변에는 사탄 마귀가 우리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우리 주변에서 매복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들을 지켜 보호해 주십니다.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마태복은 28: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역사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3. 엘리사가 아람군대의 눈을 멀게하여 그들을 포로로 잡습니다(14-19절) . 아람왕이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전면전이 펼쳐집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가 있는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도단을 포위했습니다. 15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이제 큰 일 났습니다.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던 엘리사는 여지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사환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16절을 보십니다.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한 번 따라 하시겠습니다.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믿습니까? 아멘. 우리와 함께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여호와의 많은 군대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저들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엘리사가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왕좌왕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어려운 문제를 돌파해 가는 힘입니다. 해결책입니다. 엘리사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17절)라고 합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십니다. 바로 여호와의 군대였습니다. 그때 아람 군대가 엘리사에게로 다가옵니다. 엘리사가 또 기도합니다. 이제는 반대로 아람군대의 눈을 어둡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18)고 합니다. 여러분, 이같은 말씀에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합니까? 엘리사에게 함께 해 주셨던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해 주십니다. 함께 해 주신 방법은 획일적으로 한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 포로된 아람 군대를 돌려보냅니다(20-23절) 눈이 멀게 된 아람 군대를 엘리사가 유인해서 사마리아 있는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갑니다. 소경이 된 아람 군대는 엘리사가 말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람 군대를 왕에게로 유인한 엘리사는 다시 그들의 눈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20절).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포로로 잡아온 아람 군대를 보고 감격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포로들을 다 죽이겠다고 엘리사에게 말하자 엘리사는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다시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이 일이 있는 후에 한동안 아람은 이스라엘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전쟁포로에 대한 엘리야의 정신이 담겨진 본문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각성시키고 각인시켜 주는 그러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분께 순종할 때 이런 복이 임할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범죄할 때 이런 이방 군대를 동원해서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징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순종할 때 이번 사건처럼 하나님의 종인 엘리사를 통하여 아람 군대로부터 지켜 주셨던 것처럼 은혜를 베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복음입니다. 5. 아람군에 의해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습니다(24-33절) 다시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 사마리아를 포위해 왔습니다. 이 사건은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재앙이 시작됩니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를 오래동안 포위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사마리아의 물가는 엄청나게 올랐습니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서 자식들을 잡아먹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왕은 ‘여호람’왕이었습니다. 왕은 이 전쟁과 재앙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습니까? 31절입니다.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이 말은 아람군대의 사마리아 성 포위는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한 것인데 엘리사는 이런 환난을 막기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푸념하면서 자신이 당장 엘리사의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합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그런 재앙과 환난이 임하고 있는지 여호람 왕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그 동안 누구 때문에 그들이 살아왔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은혜를 망각합니다. 자신의 책임을 회피합니다. 왕은 자객을 엘리사에게 보냅니다. 왕 자신도 자객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왕이 자신의 목을 자르도록 자객을 보냈다고 하면서 곁에 있던 장로들에게 대문을 열어 주지 말도록 당부합니다(32절). 엘리사의 말이 끝나자 왕과 자객이 들이닥칩니다. 왕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33절입니다.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왕 자신도 이런 재앙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린 것임을 압니다. 그런데 그 재앙이 자신들 때문이 아니라 엘리사 때문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 엘리사를 보십시오.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을 보십시오. 우리들은 우리들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적용과 교훈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때에 이스라엘은 분열이 되었습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라 했고 남쪽은 유다였습니다.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창섹로부터 이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남쪽 유다를 통해 계승되고 있습니다. 그 남쪽 유다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잇수르에 포로로 잡혀가 나라가 망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지먼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포로 이후에 과가 북쪽 이스라엘인 사마리에서 있었던 사건을 기록합니다.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물에 빠진 도끼를 찾는 기적, 아람 군대 이야기 그리고 사마리에서 굶주림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을 기록합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통한 하나님이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불말과 불병거가 이 땅에 임재해 있다는 것은 지상의 어떠한 무력이라도 천상(天上)의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없음을 가리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합니다. 그 능력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에게 임합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들을 지켜주십니다. 어떤 자들을 지켜주십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들에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왕하 강론 5]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하나님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왕하 5:1-27)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4장 말씀을 통하여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죄를 짓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특별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여전히 언약에 충실한 종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이적들이었습니다. 과부의 어려움에 대한 기름병 이적, 경건한 수넴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신 이적, 그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신 이적, 국 속에 있는 독을 제거시켜 주신 이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은 보리떡과 채소로 많은 사람을 먹게 해주신 예수님의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적들을 오늘날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지 말고 왜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이적들이 동원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점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바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1. 아람왕이 엘리사에게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1-7절) 엘리사가 활동했던 시대는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아합왕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 아들 역시 ‘여로보암의 길’인 악한 길을 갔습니다. 여로보암은 잘 알듯이 언약의 반열에서 이탈하여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해 나갔던 자입니다. 왕만이 악한 자가 아니라 백성들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났습니다. 그런 북쪽 이스라엘에게 엘리야 때부터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실제로 그 심판이 멸망과 흉년이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혹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 선지자에 와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적과 능력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은혜와 사랑을 북쪽 이스라엘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수리아의 이방 사람인 나아만의 병만을 고쳐주셨습니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 대목입니까? 이런 문제를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d이 주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여기 아람이란 군대 이름입니다. 나라 이름은 수리아입니다. 수도는 다메섹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아람’이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패배와 아람의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은 나아만이 용사였는데 나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들은 큰 용사를 좋아합니다. 힘이 샌 것,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큰 용사가 나병이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용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큰 용사로 불러 질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병든 한 인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왕은 자신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으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과거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왕의 집에서 수종들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왕의 고민을 듣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는 사마리에 계신 선지자에게 찾아가면 그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람 왕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자기 부하를 고쳐 달라는 친서를 써줍니다. 그리고 많은 예물을 보냅니다. 나아만 장군은 왕의 친서와 많은 예물과 그 부하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갔습니다. 그때 왕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었습니다. 2.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줍니다(8-14절) 이스라엘 왕은 아람왕의 친서인 편지를 받고 걱정했습니다. 이것은 아람왕이 전쟁의 빌미와 구실을 찾기 위해서 보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괴로웠습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 이야기를 길갈의 선지자 학교에서 듣고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합니다. 고쳐 주시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전갈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부하들을 이끌고 엘리사가 머무는 집 앞에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집 대문에 나와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엘리사가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도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할 뿐입니다. 강물에서 몸을 씻어 깨끗해질 것 같으면 요단강보다 더 깨끗한 강들이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는 얼마든지 많다는 것입니다(12절). 지금 나아만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깨끗한 강물에 있는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도 수하들의 설득에 못 이겨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우리들은 그동안 이 부분에서 어떻게 배워 왔습니까? 나아만이 나병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아만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순종했기 때문에 치료를 받았다고 가르쳐 왔고 배워 왔습니다. 물론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가 버렸다면 고침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런 나아만 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나아만을 모델로 놓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나아만의 그런 행동이 우리들의 관심에 일차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나아만의 생각대로 강물에서 목욕을 해서 깨끗해 질 것 같으면 자기들의 수도인 다메섹에 가면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한 나아만이 하나님을 믿었다거나 엘리사를 믿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아만은 자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엘리사가 크게 환영하면서 귀한 분이 오셨군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빨리 고쳐 주겠습니다”(11절)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도 엘리사도 마치 나아만 자신을 위해서 고쳐주어야 하는 분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저 죽을병에 걸려서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엘리사에게 부하들이 권면한 내용이 아니겠습니까?(13절) 이 말씀에서 우리들은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것은 나아만이 착한 사람이라던가, 순종을 잘했다던가, 그가 자존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 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십니까? 8절 하반절입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어떤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고쳐 주십니다. 열왕기하 6, 7장에서 아람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 때문에 아람 군대가 패배하게 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것은 얼마 후에 있을 전쟁에서 아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의 사람의 기적을 아람의 장관에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둘째, 나아만이 고침받은 원인이 나아만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야줍니다. 요단강의 깨끗지 못한 물은 나아만의 병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병이 고침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나아만의 병 고침은 강물이 아닙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상식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아만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무서움과 위대함을 보여주시므로 추후 아람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이길 수 없습니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나아만을 자랑하고 나아만을 우리들의 모범된 인물로 만든다는 것은 본문의 기록 의도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그의 어떠한 업적도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과 죄의 고백만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들은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우리들은 무가치한 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섭리가 있다면 우리들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3.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합니다(15-19절) 나아만이 병 고침을 받고 나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나아만이 이제 비로소 신앙을 고백합니다. 온 천하에 하나님이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누가복음 4:27절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사실을 염두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만의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사도 모든 이스라엘의 모든 나병자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고 오직 수리아의 나병인 나아만 뿐이었다는 말씀을 합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들이 정작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아람왕이 보낸 답례품을 엘리사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 답례품은 당시에 참으로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그 병을 고쳐주셨다면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자신이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치셨음을 예물을 받지 않음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수기도해 주고 헌금이라는 명분으로 돈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헌금을 교회 재정부에 입금하여 교회가 절차에 따라 집행하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헌금을 이용해야 자신의 정치적 자금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4.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예물을 가로챘습니다(20-27) 엘리사가 예물을 받지 않게 되자 나아만이 가지고 본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때 욕심을 낸 게하시가 뒤따라가면서 엘리사가 그 예물을 다시 달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게하시가 그 예물을 자기 소유로 삼았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심판합니다. 왕하 5: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얼마나 무섭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이런 저주를 받을 자는 없습니까? 이 말씀은 어쩌면 평신도들보다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교훈과 적용 본문의 역사적 상황은 엘리사가 활동했던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이때 아람 나아만의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방나라 군대장관이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사건은 유다왕국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나 범죄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아닌 이방나라 군대장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보고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얼마든지 범죄할 때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 인생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위해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쓰임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과 부활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사건이요, 섭리적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 살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
[왕하 강론 4]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3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물을 공급해 주시고 모압을 치게 하신 하나님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 역시 다른 왕들처럼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했습니다. 여호람의 부친인 아합이 북쪽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조공을 바쳤던 모압이 이제 여호람이 왕이 된 이후 바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남쪽 유다와 에돔과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모압을 치러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물을 공급해 주시고 모압을 치게 하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 주십니다. 1. 과부의 어려움을 기름병 이적으로 도와줍니다(1-7절). 열왕기하 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을 보시겠습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선지생도가 아내와 두 아이를 두고 죽었습니다. 그 아내는 이제 과부가 된 것입니다. 그 과부가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무거운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선지 생도인 남편이 많은 빚을 남기고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빚쟁이가 빚 대신 두 아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겠다는 기막힌 사연을 엘리사에게 전합니다. 이런 어려움은 엘리사 당시에나 지금이나 똑 같은 것 같습니다.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공부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준비한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납니다. 사모님은 이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잘해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목사님이 과로로 쓰러져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사모님은 앞길이 캄캄합니다. 교회에서는 사택을 비워 달라고 합니다. 눈물을 머금고 아무런 대책이 없이 교회에 쫓겨난 사모님들과 자녀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선지자 엘리사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고 합니다. 엘리사는 과부에게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과부는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라고 합니다(2절). 이 말을 듣고 있던 엘리사는 이웃집에 가서 빈 그릇을 많이 빌려 오라고 했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두 아들과 함께 그릇마다 기름을 따라 부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릇마다 부을 때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두 아들과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여기 이 기적의 혜택을 본 아내와 두 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엘리사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7절)이라고 합니다.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므로써 엘리사가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은 “여호와를 경외했던”(1절)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려움에 빠져 있는 그 가정에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이 임했습니다. 2. 경건한 수넴여인에게 아들을 약속합니다(8-16절).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수넴이란 지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경건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엘리사를 초대하여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그 뒤로 엘리사는 그 마을을 지날 때마다 그 여인의 집에 들러서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대접할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 방 하나를 마련하여 엘리사에게 제공했습니다. 선지자가 쉬어 갈 수 있는 방을 별도로 만든 것입니다. 방을 만들면서 그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하면서 방을 만들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9절)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했습니다. 마태복음 10:4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수넴여인이 제공한 방에서 엘리사와 엘리사를 돕고 있던 사환인 게하시가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수넴여인을 불러오라고 합니다(12절). 그 여인이 오게 되자. 엘리사는 “이렇게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시는 부인께 우리가 대신 무엇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혹시 우리가 왕이나 군사령관에게 가서 부인의 아들을 위해 부탁할 일은 없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여인은 아무 어려움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엘리사는 무엇인가 이 여인에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나무나 고마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사환인 게하시에게 부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게하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까 하니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하니.” 수넴여인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들을 두기에는 남편이 너무 늙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엘리사가 할 일을 발견합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다시 그 여인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그 여인이 오게 되자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이 말씀은 내년 이 맘 때가 되면 아들을 품에 안을 것이라고 약속해 줍니다. 그러나 이 수넴 여인은 아브라함의 아내처럼 그럴 수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아들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차단되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닫힌 태의 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동안 아들이 없는 수넴 여인의 생활이 어떠했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들을 낳지 못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아왔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는 인간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나이에 선지자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줍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긍휼과 복입니다. 그 긍휼과 복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므로 “하나님을 영접”한 그 가정에 내린 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셔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살아가는 종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3. 죽은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려주십니다(17-36). 본문 17절에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엘리사가 여인에게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약속해 준대로 그 여인은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제법 자란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밭에 추수하는 곳에 갔다가 갑자기 마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 품 안에서 그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남편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죽은 아이를 자기 집의 선지자 침실에 뉘어 놓고 급히 엘리사가 있는 갈멜산으로 갔습니다. 수넴에서 갈멜산까지는 약 24킬로미터쯤의 거리입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에게 하소연하며 슬픔을 토로합니다.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28절) 내가 원하지도 않는 아들을 주시더니만 그 아들이 죽었으니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가서 고쳐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가서 고쳐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가서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려 주시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수넴여인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임했습니다. 어린 생명을 수넴여인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죽었던 아들을 살려주시므로 그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같은 그들의 믿음 위에 하나님의 은혜는 충만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런 말씀을 읽고 어떤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까? 수넴여인의 집에 선지자를 통하여 찾아오셨습니다. 그 여인의 집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의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은 우리들의 첫 열매였습니다. 우리들도 그처럼 부활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국 속에 있는 독을 제거시켜 주셨습니다(38-41절). 당시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했던 북쪽 이스라엘은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할 때 내린 징계였고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땅에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여전히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사가 성소가 있는 길갈로 돌아왔습니다(38절). 그곳에는 선지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었기에 먹을 것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들에서 채소를 캐 와서 국을 끊였습니다. 그런데 그 채소에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국은 먹을 수 없었습니다. 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에서 캐 온 채소에 독이 있었다는 것은 채소마저 먹을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이 닥쳐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언제나 백성이 타락할 때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은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를 무너지게 합니다.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지게 한다던가 땅이 열매를 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지금 그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그 독이 들어 있는 국을 깨끗케 하는 기적을 베풀어줍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했습니다. 먹을 수 없는 국을 먹을 수 있는 국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기적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징계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40절). 5. 적은 떡과 채소로 많은 군중을 먹게 하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42-44절). 마치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는 듯합니다. 어떤 사람이 첫 열매로써 보리떡과 채소를 엘리사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00명에게 다 줄 수가 없었습니다. 100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43절). 그랬더니 44절에 보니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라고 합니다. 교훈과 적용 우리들이 살펴본 열왕기하 4장은 하나님의 기적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이런 기적은 심판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과 자비였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4장은 무려 10번 정도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가 등장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란 엘리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하심과 자기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관심이 얼마나 자상하시고 세밀하신 가를 보여줍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믿고 신앙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어려운 일로 인하여 좌절하면 안 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관심과 은혜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4장의 여러 기적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긍휼과 자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