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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론 5]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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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론 5]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하나님

본문 / 왕하 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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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왕하 5:1-27)


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4장 말씀을 통하여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죄를 짓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특별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사랑은 여전히 언약에 충실한 종들을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이적들이었습니다. 과부의 어려움에 대한 기름병 이적, 경건한 수넴여인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신 이적, 그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신 이적, 국 속에 있는 독을 제거시켜 주신 이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적은 보리떡과 채소로 많은 사람을 먹게 해주신 예수님의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적들을 오늘날에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지 말고 왜 하나님의 말씀에 이런 이적들이 동원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점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바로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1. 아람왕이 엘리사에게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1-7절) 


엘리사가 활동했던 시대는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아합왕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 아들 역시 ‘여로보암의 길’인 악한 길을 갔습니다. 여로보암은 잘 알듯이 언약의 반열에서 이탈하여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해 나갔던 자입니다.


왕만이 악한 자가 아니라 백성들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났습니다. 그런 북쪽 이스라엘에게 엘리야 때부터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실제로 그 심판이 멸망과 흉년이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혹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의 후계자인 엘리사 선지자에 와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이적과 능력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은혜와 사랑을 북쪽 이스라엘에게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눅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수리아의 이방 사람인 나아만의 병만을 고쳐주셨습니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 대목입니까? 이런 문제를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d이 주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


여기 아람이란 군대 이름입니다. 나라 이름은 수리아입니다. 수도는 다메섹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아람’이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이 왕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패배와 아람의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내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은 나아만이 용사였는데 나병에 걸렸습니다. 우리들은 큰 용사를 좋아합니다. 힘이 샌 것,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큰 용사가 나병이 걸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용사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큰 용사로 불러 질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병든 한 인간에 불과할 뿐입니다. 왕은 자신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렸으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과거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아온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왕의 집에서 수종들고 있었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왕의 고민을 듣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시겠습니다.


“그의 여주인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나병을 고치리이다 하는지라.”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는 사마리에 계신 선지자에게 찾아가면 그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람 왕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자기 부하를 고쳐 달라는 친서를 써줍니다. 그리고 많은 예물을 보냅니다. 나아만 장군은 왕의 친서와 많은 예물과 그 부하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갔습니다. 그때 왕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었습니다.


2.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줍니다(8-14절) 


이스라엘 왕은 아람왕의 친서인 편지를 받고 걱정했습니다. 이것은 아람왕이 전쟁의 빌미와 구실을 찾기 위해서 보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은 괴로웠습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이 이야기를 길갈의 선지자 학교에서 듣고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라고 합니다. 고쳐 주시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전갈을 받고 나아만 장군은 부하들을 이끌고 엘리사가 머무는 집 앞에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집 대문에 나와 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나아만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엘리사가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도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할 뿐입니다. 강물에서 몸을 씻어 깨끗해질 것 같으면 요단강보다 더 깨끗한 강들이 아람의 수도 다메섹에는 얼마든지 많다는 것입니다(12절).


지금 나아만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깨끗한 강물에 있는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도 수하들의 설득에 못 이겨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우리들은 그동안 이 부분에서 어떻게 배워 왔습니까? 나아만이 나병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아만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순종했기 때문에 치료를 받았다고 가르쳐 왔고 배워 왔습니다. 물론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고 가 버렸다면 고침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런 나아만 처럼 자존심을 버리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 치료를 받을 것이라고 적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금 나아만을 모델로 놓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나아만의 그런 행동이 우리들의 관심에 일차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나아만의 생각대로 강물에서 목욕을 해서 깨끗해 질 것 같으면 자기들의 수도인 다메섹에 가면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한 나아만이 하나님을 믿었다거나 엘리사를 믿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아만은 자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엘리사가 크게 환영하면서 귀한 분이 오셨군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빨리 고쳐 주겠습니다”(11절)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도 엘리사도 마치 나아만 자신을 위해서 고쳐주어야 하는 분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저 죽을병에 걸려서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엘리사에게 부하들이 권면한 내용이 아니겠습니까?(13절) 이 말씀에서 우리들은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신 것은 나아만이 착한 사람이라던가, 순종을 잘했다던가, 그가 자존심을 버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 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십니까? 8절 하반절입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엘리사 선지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어떤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고쳐 주십니다. 


열왕기하 6, 7장에서 아람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전쟁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있는 엘리사 때문에 아람 군대가 패배하게 됩니다.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것은 얼마 후에 있을 전쟁에서 아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의 사람의 기적을 아람의 장관에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둘째, 나아만이 고침받은 원인이 나아만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야줍니다. 요단강의 깨끗지 못한 물은 나아만의 병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그러나 병이 고침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나아만의 병 고침은 강물이 아닙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상식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아만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무서움과 위대함을 보여주시므로 추후 아람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이길 수 없습니까?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나아만을 자랑하고 나아만을 우리들의 모범된 인물로 만든다는 것은 본문의 기록 의도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어떠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그의 어떠한 업적도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과 죄의 고백만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들은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우리들은 무가치한 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들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섭리가 있다면 우리들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3.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합니다(15-19절) 


나아만이 병 고침을 받고 나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15절을 보시겠습니다.


“나아만이 모든 군대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의 앞에 서서 이르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하건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하니.”


나아만이 이제 비로소 신앙을 고백합니다. 온 천하에 하나님이 주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누가복음 4:27절입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사실을 염두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만의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사도 모든 이스라엘의 모든 나병자들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고 오직 수리아의 나병인 나아만 뿐이었다는 말씀을 합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백성들이 정작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아람왕이 보낸 답례품을 엘리사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그 답례품은 당시에 참으로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의 병을 고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것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그 병을 고쳐주셨다면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자신이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치셨음을 예물을 받지 않음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수기도해 주고 헌금이라는 명분으로 돈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헌금을 교회 재정부에 입금하여 교회가 절차에 따라 집행하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헌금을 이용해야 자신의 정치적 자금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4.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예물을 가로챘습니다(20-27) 


엘리사가 예물을 받지 않게 되자 나아만이 가지고 본 고향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때 욕심을 낸 게하시가 뒤따라가면서 엘리사가 그 예물을 다시 달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게하시가 그 예물을 자기 소유로 삼았습니다. 엘리사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심판합니다.


왕하 5: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얼마나 무섭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이런 저주를 받을 자는 없습니까? 이 말씀은 어쩌면 평신도들보다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교훈과 적용


본문의 역사적 상황은 엘리사가 활동했던 시대입니다. 그 시대는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이때 아람 나아만의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방나라 군대장관이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신 사건은 유다왕국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나 범죄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아닌 이방나라 군대장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보고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얼마든지 범죄할 때 그들에게서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 인생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위해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쓰임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과 부활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사건이요, 섭리적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 살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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