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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슈] 행위언약, 무엇이 쟁점인가?개혁신학에서 계시의 점진적 발전 개념과 계시 이해의 점진적 발전 개념을 인정한다. 성경 창세기에서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계시의 점진적 발전은 창세기에서 시작한 계시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빛의 형태로 성취로 발전된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의 통일성에 근거를 제공한다. 특별계시인 성경이 66권 형태로 완성된 이후 계시 시대의 특별계시 방편은 중지되었다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내용이다(제1장 1절). 꿈과 이적 등은 특별계시 시대에 특별계시의 방편으로 주어졌지만, 이제 특별계시가 완성된 이후에는 특별계시의 방편은 중지되었으므로 일반계시의 방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꿈과 이적이 계시의 종결 이후의 일반적인 꿈과 이적의 개념을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이 개념이 모호할수록 일반계시를 특별계시로 오해하여 마치 오늘날도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존재하고 있는 듯한 주장을 편다. 이는 66권 성경의 충족성을 거부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아담 언약, 능동적 순종 아담 언약으로 일컬어지는 행위언약에 대한 논란은 하나님의 창조경륜과 구속경륜과 관계된 문제이므로 바른 개념이해가 요구된다. 하나님이 첫 언약의 대상자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였으며(창 1:27),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의 좋은 상태로 지으셨다(창 1:31). 창조 내력(톨레도트)을 기록한 창세기 2:4절 이하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여호와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을 그곳에서 살게 하시고(창 2:8), 관리자로 허락했다(창 2:15).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창 2:9).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되”(창 2:1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명령하셨다(창 2:17). 이 명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경륜 속에서 아담과 맺은 첫 언약이다. 이를 하나님과 아담이 맺은 ‘언약’으로 설명한다(호 6:7). 아담과 맺은 이 언약의 성격 이해는 하나님의 창조경륜과 구속경륜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첫 언약을 행위언약으로 본 이유는 ‘선악과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약속을 행위언약을 본다. 이는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한다는 개념이해가 돼 버린다. 순종의 행위 여부에 따라 영생과 죽음이 결정되는 행위언약으로 설명한다. 이는 이미 하나님의 아담 창조를 불완전한 창조를 전제한 개념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아담과 맺은 언약은 아담의 순종행위 여부에 따라 영생과 저주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하도록 하는 완벽한 인간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런 개념은 아담과 맺은 언약이란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주인이요, 아담은 그의 피조물이며, 피조물인 아담은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살게 했다. 순종 여부에 따라 영생과 저주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벽한 자로 지음을 받아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으므로 순종한다. 이때 순종은 의무로서가 아닌 능동적 순종이다. 능동적 순종은 피조물로서 자기 위치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주되심을 늘 찬양하며, 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아담과 맺은 언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능동적 순종을 해야 함에도 이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 아담은 피조물의 속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뱀의 유혹을 받아 피조물의 속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신의 속성으로 살아가려는 유혹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 이 불순종의 행위가 바로 선악과 열매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반역한 행위이다. 신의 속성을 소유하고자 한 유혹 아담은 영생과 선악을 모두 공유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담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거역했다. 하나님은 아담과 맺은 언약을 통해 아담에게 생명과를 차단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생명과 선악 모두를 공유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 아담은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아담은 죄악의 눈이 밝아져 벗은 자신을 돌아보며 수치가 드러났다(창 3:7).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숨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창 3:8).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반역하게 한 뱀은 저주받게 되었으며(창 3:14), 이 뱀은 요한 계시록에서 사단으로 언급한다(계 12:9). 아담에게 생명과는 먹지 못하도록 하여 영생을 차단하였으며(창 3:22), 불순종의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게 했던 뱀을 저주하고 땅도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받게 되었다(창 3:17). 이제 아담과 그 후손의 저주를 풀기 위해 창세기 3:15 절에서 ‘여자의 후손’인 생명의 후손을 약속해 주셔서 뱀으로 상징된 사단을 결박하여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생명의 후손인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과 그 세력을 결박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인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통해 구원을 베푸셨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경륜과 구속경륜은 아담과 맺은 언약 속에서 보여준 중요한 개념이다. 행위언약인가, 창조경륜인가?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전적으로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과 맺은 언약을 ‘창조언약’이라 한다. 타락 이후의 언약을 ‘구속언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창조언약과 구속언약으로 구분한다(김의원, 「언약신학과 계시의 점진적 발전」 참조). 그러나 ‘창조 언약’을 ‘아담 언약’, 혹은 ‘행위언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개념을 근거로 타락 전을 ‘행위언약’이라고 하고, 타락 후를 ‘은혜언약’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제7장 참조)은 후자인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한다. 1647년에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에 언약사상이 도입되어 ‘행위언약’으로 채택되었다. 행위언약의 핵심은 “사람과 맺은 최초의 언약은 행위언약이었으니 그것에서 자신적(自身的) 순종을 조건으로 하여 아담에게와 또 그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라고 했다(창 2:16-17, 갈 3:10, 호 6:7, 롬 5:12, 19, 고전 15:22, 4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행위언약을 인용한 대표적인 성경 구절인 호세아 6:7절 말씀인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고 이스라엘 자손과 언약을 맺으셨다. 아담이 언약을 어기고 반역하였듯이 이스라엘 자손 역시 언약을 어기고 반역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아담이 언약을 어기고 반역한 것과 이스라엘 자손이 언약을 어기고 반역한 것과 구분되어야 한다. 아담의 언약은 죄로 인한 타락 이전의 사건이라면 이스라엘 자손과 맺은 언약은 그 이후의 사건이다. 그러나 두 언약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반역했다는 점은 같지만, 이 모든 언약을 행위언약은 아니다. 전자는 창조언약이고, 후자는 구속언약이다. 아담과 맺은 언약을 행위언약이라는 주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서철원 박사는 자신의 「교의신학」에서 “행위언약은 아담의 타락으로 생명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다른 언약 곧 은혜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진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서철원 박사는 이러한 행위언약은 “잘못 설정된 언약 개념이다”라고 전제한 뒤 “하나님의 창조경륜에 전적으로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처음 창조시 아담을 불완전하게 창조하셔서 계명을 지키면 영생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조건으로 언약을 체결했다.” (서철원, 「인간론」, 170-171 참조) 서 박사는 “이 언약을 주신 계명을 성취하면 영생에 이르도록 하신 약정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어 서로 교제할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성취하면 그 행위의 공로로 영생을 얻게 한 것이 된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간을 영생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 된다. 영생에 이르도록 완전해지는 것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이루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사람은 타락 가능성을 가지고 만들어져서 범죄하는 것은 정해진 일이 된다”라고 반론을 폈다(서철원 위의 책, 171-172 참조). 결국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계명 순종이라는 조건 이행으로 획득해야 할 것이다. 계명 순종을 이루어 영생을 획득하도록 언약을 체결하였으니 행위언약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행위언약을 주장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 “모세의 율법에서 행위언약을 시작”하며 “행위언약은 체결 면에서 보면 창세가 2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거기에는 “모세의 율법 책 같은 것은 아직 없었고 단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이리라는 말씀만 있다. 그런데 첫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하면서 창세기 2장에서 시작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 본론에서 시작한다”며 행위언약의 한계를 지적했다(서철원 위의 책, 177). 그렇다면 서철원 박사는 아담과 맺은 언약을 어떻게 설명하며 논지를 펼쳐가고 있는가? 그는 “창조경륜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체결하셨다”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아담과 맺은 언약 체결의 근본 목적이 “창조주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또 언약을 체결하면 언약의 주이신 하나님이 반드시 그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을 밝혔다.”라고 했다(서철원의 위의 책, 146-147 참조). 대한예수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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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고백과 세례성례전은 은혜의 방법이다.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이 은혜의 방편인 성례는 이미 얻은 구원의 은혜를 강하게 확증하는 것이므로 구원의 필수적인 방법이 아니다. 즉 성례전을 받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성례는 거룩한 의식으로 세례와 성찬이 있다. 세례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의 표로 시행하는데 세례를 받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이 죄에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음을 고백하여야 한다. 믿음의 고백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완전히 씻어져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표로 세례를 받는다. 또한 세례는 언약 백성으로 들어가는 예식이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하여 언약 백성이 되는 서약이다. 또는 세례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가입하는 예식이다. 예수를 믿고 죄를 용서받아 세례를 받으면 교회에 가입하여 책임 있는 교회 일원이 된다. 니케야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가 공식화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이 세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게 되었다(마 28:19). 그러므로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시행해야 한다. 믿음의 고백이 없으면 세례를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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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강해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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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역사적 성경연구 제14강 레위기 제사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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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강해] 여룹바알의 교훈29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 자기 집에서 살았는데, 30 기드온은 아내가 많았으므로 자기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1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다. 3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 많아 죽으니, 아비에셀 사람들의 땅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무덤에 묻혔다. 33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을 음란하게 섬기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으며, 34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구원한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고, 35 또한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의 집에 은혜를 베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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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륜과 그리스도의 구속그리스도교(기독론)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구원 사역으로 매우 중요하게 제기된다. 하나님은 자기 창조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를 말씀을 통해 보여주셨다. 그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를 만드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첫 남자인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요, 인간은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으며, 그 자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을 경배하며 에덴동산의 청지기로 창조주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다. 그러나 유혹자의 등장으로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결과로 죽음과 저주의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역한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돌이켜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아담인 인간은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이때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죄값을 대신 갚으셔서 타락한 인류를 친히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을 입고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의 피를 통해 인류의 죄값을 갚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해 주셨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이루셨다. 창세기에서부터 구약성경에 등장한 제사와 제물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위한 약속이며 신약은 그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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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해 13] 유다 요아스 왕의 성전수리와 실책-암살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11장 말씀을 통하여 “유다왕조의 씨를 진멸하려는 아달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남쪽 유다 왕인 아하시야가 죽게 되자 그의 어머니인 아달랴가 그의 손자들을 다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아달랴는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합왕의 아내가 이세별이었다면 아달랴는 이세별의 딸이기도 합니다. 악한 이세별의 딸인 아달랴가 정통성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열인 유다왕국을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무려 6년 동안 아달랴가 남쪽 유다를 처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달랴가 손자들을 다 죽일 때 요아스는 성전에 숨겨져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일곱 살 되는 해에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가 경비대장들과 함께 아달랴를 죽이고 정통성 있는 왕족인 유다 나라의 요아스를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파괴하려고 했던 아달랴는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합니다. 사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1. 요아스가 40년 동안 남쪽 유다 예루살렘을 치리합니다(1-3절). 본문 1절을 보시겠습니다. “예후의 제칠 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고 합니다. 요아스의 할머니인 아달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그 이후 요아스가 유다 나라 왕이 됩니다. 40년 동안 치리했습니다. 그는 대체로 정직하게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나라는 다스렸지만 산당은 제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면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라고 합니다. 제사장 여호야디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제사장의 교훈을 받은 요아스 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정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산당은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 놓은 실수를 범합니다. 3절에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진행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백성은 왕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버립니다. 대신 바알신을 자신의 주님으로 섬깁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오게 하려고 그들을 징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의 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의 육신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 육신적인 세력을 남겨 놓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육신적인 세력들이 성장합니다. 나중에 그 세상적이며 육신적인 생각과 사고방식에 오히려 점령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한 두 번 빠집니다. 그러다가 빠지는 횟수가 늘어납니다. 이제는 아예 교회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립니다. 죄를 짓습니다.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협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과감하게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아스는 산당은 제거하지를 못한 실수를 범하여 이 문제로 백성이 우상에서 제사를 지내는 불행한 모습이 그 나라를 망치게 합니다. 2. 요아스 왕은 제사장들에게 백성이 드리는 은으로 성전을 수리하게 합니다(4-8절). 요아스 왕은 각 제사장에게 백성들이 낸 은으로 여호와의 전인 성전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왕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본문 4절에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이라고 합니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예물로 바친 모든 은, 곧 각 사람이 세금으로 바친 은과 각 사람이 약속하여 바친 은과 스스로 원해서 바친 은을 받아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제사장마다 그가 섬기는 백성들에게 은을 받아서 성전을 수리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수리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그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성전의 기능은 이렇게 중요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과 같은 중요한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이 깨끗하고 수리돼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백성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은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이 낸 은으로 그 성전을 수리하라고 했던 것입니다(5절). 그런데 문제는 제사장들이 그 성전을 수리하지 않습니다. 수리할 부분이 없어서 수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수리할 부분이 많이 있는데도 수리하지 않습니다(6절). 이때 요아스 왕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를 부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그러나 요아스가 왕이 된 지 이십삼 년째가 되었는데도 제사장들은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아스 왕은 7절에 이렇게 명령합니다.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성전에 드리는 은으로 제사장들이 명령대로 성전을 수리하는데 지출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제사장들이 받아 관리했던 은을 오직 성전 수리하는데만 사용하도록 백성들이 직접 성전에 바치도록 했습니다. 3. 왕의 명령대로 대제사장 여호야다는 성전을 수리합니다(9-16절). 백성들이 성전에 직접 낸 은으로 성전 수리하는 비용으로 지출하는 말씀입니다. 10절에 보면 궤 안에 돈이 가득 차면 왕의 신하와 대제사장이 와서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온 돈을 계산하고 그 돈을 자루에 담았습니다. 11절에 돈 계산이 끝난 뒤에는 그 돈을 성전 공사를 맡은 사람들에게 주어 여호와의 성전에서 일하는 목수와 돌 쌓는 사람들의 품삯으로 쓰게 했습니다. 온전히 성전 수리에만 사용하는 특별 재원이었습니다. 이제 그 돈으로 미장이와 석수들에게 품삯을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데 필요한 나무와 돌을 사들이는 데에도 썼습니다. 그 밖에 성전을 수리하는 데에 드는 모든 비용에도 그 돈을 사용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성전에 드린 은을 다른 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전 수리하는 비용에만 사용되었습니다(13-14절). 너무나 오랫동안 성전을 수리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도 성전 수리하는데 비용을 사용하지 않고 성전 기물을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성전이 방치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곳은 어떤 공간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한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시는 곳입니다. 그것은 오직 제사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전이 수리를 필요할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불순종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요아스 왕은 성전 기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전을 수리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성전 그 자체가 무너져 있다면 그 성전 안에 제아무리 좋은 기물을 만들어 놓는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아스 왕은 무너진 성전을 수리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남쪽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무너진 상전을 증축하고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 공사는 이방인들로 인하여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중단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위로하는 말씀을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서만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와서도 그 성전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수리한다는 것은 요아스의 신앙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는 이같은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구약의 성전을 수리하기 위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은을 모았듯이 우리도 성전을 짓고 수리하기 위한 헌금합시다”라는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구약의 성전을 그대로 오늘날 예배당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 성전은 오늘날 적용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적용해야 합니다.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전이 곧 자기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제 신자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전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고전3:17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고후 13: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과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성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즉 성령이 우리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그 거룩하심을 훼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침략해 온 아람 왕 하사엘에게 성물을 주어 돌려보냅니다(17~18절) . 요아스 왕 때 아람 왕이었던 하사엘이 침략해 왔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방 대적이 침략해 왔습니다(17절). 이런 상황이라면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들을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태도를 보십시오. 18절에 보면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라고 합니다. 유다 왕 요아스가 자기 선대의 유다 왕들인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거룩하게 바친 모든 성물들과 자기가 바친 성물들, 그리고 여호와의 전의 보물 창고와 왕궁에 있는 모든 금을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가 예루살렘에서 물러갔다. 요아스 왕은 선조들이 구별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린 성물과 금을 취하여 하사엘에게 뇌물로 줍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뇌물로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뇌물이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왕의 발상이나 그런 뇌물을 받고 물러가는 하사엘이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님께 원치 않는 일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심판받을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결정하고 기도로 진행해야 합니다. 편법으로 일을 진행할 때 처음에는 제법 그런대로 잘 풀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일이 잘 진행된다고 해서 그것이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기 치지 않고 편법으로 하지 않으면 무슨 사업이 됩니까”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원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5. 요아스가 암살당하여 죽고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됩니다(19-21절). 요아스 역시 하나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라고 합니다. 요아스는 비참에게 남쪽 유다 열왕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그가 어렵게 왕이 되긴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좋은 일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왕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잘못한 행위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남 왕조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치리했습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습니다. 요아스가 죽어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묻혔습니다. 저는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역대하 24:25에 의하면 요아스가 다윗성에 장사 되긴 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죽자 아들 아마샤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요아스가 죽었지만, 그의 아들 아마샤가 남 왕조의 왕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 진행됩니다. 교훈과 적용 아하스는 남 왕국 왕으로 심복에게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을 수리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성전 수리는 하나님께 올바른 제사가 드려지기 위한 요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전의 금은보화를 이방 왕에게 뇌물로 바치는 불법을 범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긴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요아스 왕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 그리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제사와 제물을 통해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사자를 살리기 위해 대리자의 희생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에서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그는 어린양의 제물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 열왕기하 12장에서도 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순종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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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기도교회를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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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마지막회]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마가복음 강해 마지막회] 하나님의 아들의 역tk 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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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근원과 시작창세기에서 첫 아담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죄하므로 반역한 것은 유혹자 뱀이다.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영적 존재로서 마귀 곧 사탄이라고 하여 유혹자 마귀 곧 사탄을 뱀으로 일치시키고 있다(계 20:2-3). 첫 아담이 유혹자에 넘어가 하나님을 반역하게 된 문제는 풀리지 않는 비밀로 남아 있다. 성경은 언제 어떤 계기로 사탄이 범죄하게 되었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영적 존재로서 사탄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피조물인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의 존재 자체는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찬양하는 데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죄의 기원이다. 죄의 기원을 창조주와 창조 자체에 둘 수 없다. 악과 죄의 기원을 창조주 하나님께 두는 것은 창조 자체를 죄라고 규정하는 것이 되므로 이는 신성모독이라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한 것은 창조 사역이 마쳐진 일정한 후에 악과 죄가 생겼다. 하나님은 선 자체이시고 존재의 근원이시다. 악과 죄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오지 않았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왔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벨까우어는 “죄는 시작만 있고 기원이 없다”라고 말한다. 즉 “죄는 하나님에게서 기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