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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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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열 목사 

 


총신대학교 목회신학박사원, 미국 리폼드신학대학원(목회학박사), 칼빈대학교 대학원(Th.M., Ph.D.), 조선대학교(법학석사, 법학박사), 칼빈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강의 역임, 현 한국교회법연구소장, 새사랑교회 담임


◈ 학위 논문 

-. 목회학 박사 학위 논문 : 장로회 정치에 있어서 합리적인 당회 운영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합동) 헌법을 중심으로- 

-. 철학박사 논문 : 51인 신앙동지회와 자유주의 신학과의 투쟁: 1945-1959

-. 법학박사 학위 논문 : 교회정관에 관한 민사법적 연구


◈ 저 서

1. 하나님의 자계계시 

2. 성경해석과 강해설교

3. 기도의 신비

4. 기도 응답의 신비 

5. 복음의 변증 

6. 구속사 중심의 구약성경 맥 찾기 

7. 구속사 중심의 신약성경 맥 찾기 

8. 하나님 말씀의 의도에 충실하라 

9. 십자가 복음의 능력 

10. 기적의 사건들 

11. 성경적 기도설교 

12. 52주 철야기도설교 핸드북 

13. 구속사 설교의 논쟁 

14. 가계에 흐르는 저주 성경적인가? 

15. 52주 구속사 설교 핸드북 

16. 합리적인 당회 운영 

17. 10단계 신앙 훈련 

18. 하나님의 구원 

19. 구속사 중심의 절기 설교 

20 찬양과 치유 음악 

21. 창세기 말라기 전권 장별 구속사 맥 찾기(총 30권) 

22. 주제 설교집, 23. 구속사 중심의 예수님 비유 설교 

24. 말씀과 부흥

25. 예수님의 비유설교 

26. 신구약성경 맥 찾기 

27. 남평교회 103년사 

28. 호남선교이야기 

29. 전자 출판 CD(도서출판 갈릴리) 

30. 헌법(합동) 정치편 해설 

31. 교회정관법 총칙 

32. 교회분쟁현장보고서 

33. 종교인 과세와 자치법규 

34. 예장합동 헌법

35. 권징조례 해설

36. 교회의 적법 절차

38. 신비의 계시 로마서

 

 

사도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본문 / 고전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1:26-31절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부르심은 인간의 가문이나 학벌, 학식,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부르심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간혹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남다른 그 뭔가가 있어서 부르심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은 언제나 자랑이었습니다. 그 자랑은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적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분포도는 노예였거나 노예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의 세상의 지혜와 힘을 가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은 천한 출신자들입니다. 말 그대로 연약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지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좋은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구원을 받도록 부르셨음을 받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조건 없는 부르심이었으며, 자기 자랑을 하지 못 하게 함은 물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철저한 구원의 은혜성이었습니다.


본문인 고린도전서 2:1~5절 말씀을 통하여 “바울의 십자가 설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주제는 목회자의 설교에 관한 이야기도 되지만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전도는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어떠한 원칙과 원리에 의해서 전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설교(전도)의 방법(1, 4)


첫째, 방법, 접촉점의 중요성입니다.


‘방법’이란 단어를 먼저 생각해 본 후 본문 말씀을 돌아가 살펴보겠습니다. 이 ‘방법’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도 “연구 방법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주제를 어떠한 방법에 따라 연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연구 대상이 먼저 결정됩니다.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어떠한 방법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는 소위 인식론이라 합니다. 어떠한 인식의 원리로 연구 대상을 접근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 안에서 직분자를 선택하는 투표를 합니다.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투표하느냐에 따라 당선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어떤 사업을 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웁니다. 사업 대상이 결정되면 어떠한 방법으로 사업을 할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물건을 팔 때도 누구를 상대로 어떠한 방법으로 물건을 소개하여 팔 것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상대방을 설득할 때 어떤 방법으로 설득할 것인가, 설득의 방법을 우리는 ‘접촉점’이라고도 합니다. 설득자와 피 설득자 간에 공유할 수 있는 접촉점은 대화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대화를 경청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방법론, 접촉점, 인식론 등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방법, 어떠한 접촉점으로 복음을 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전도와 말씀선포의 접접촉점은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말씀합니다. 


둘째,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1).


본문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증거’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증언’,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 등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는 결국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까? 이 점이 중요합니다. 당시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동격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것도 아니요,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명의 ‘주’로 믿어야 가능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유대인의 신지식과 구원 관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환난을 받았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였습니다. 감춰졌던 비밀의 계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믿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말씀 선포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가능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이러한 복음, 하나님에 관한 비밀의 계시를 고린도의 헬라(그리스) 철학이나 지혜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철학적 사변이나 현란한 수사학을 동원하여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증거를 일관된 통일성과 근거에 의한 논리로 논증을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리와 논증은 헬라 철학이나 지혜에 근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본문 말씀에서와같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상한 말이나, 뛰어난 말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하나님의 증거란 이런 인간의 지혜로운 말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4).


본문 4절을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도할 때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들로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31-16:33절은 예수님의 고별설교로 유명합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등 하나님에 관한 계시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볼 때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관해 분명히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제자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보혜사 성령이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성령입니다. 세상이 능히 저를 받지 못합니다(요 14:16-17).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가르치고 생각나게 합니다(요 14:26).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그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요 16:26).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요 16:1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행 1:3). 그리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고, 성령께서는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며”(요 14:11),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이며”(요 14:9),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기록으로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혹은 복음의 말씀과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강림하신 성령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이 주된 임무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령에 대한 문제 때문에 문제가 되자 그 해결책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하므로 해결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고 힘 있는 성도,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도는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고 주장해 왔고 계속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린도 교회 안에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치열했습니다. 사도는 이에 대한 해답으로 오직 예수였고 그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에 어떤 방법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까? 본문 4절에 의하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자나 설교자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이름으로 온갖 세상의 지혜나 이야기로 설교 시간을 보냅니다. 설교 시간에 성경 본문 말씀을 이해시키기 위해 예화를 사용합니다. 많은 설교학자는 예화는 건물의 창문과 같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예화가 본문 말씀을 압도합니다. 방안에 창문이 하나면 족합니다. 


그런데 그 조그마한 방안에 창문 5-10개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설교 시간에 너무나 예화가 많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세상의 방법으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식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지 않았다고 강조합니다. 오직 성령을 의지했으며, 성령을 사모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좁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있게 증거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복음 선포와 설교여야 합니다.


2. 설교(전도) 내용(2)


본문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사도는 왜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했습니까? 고린도 사람들의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그리스 철학이나 지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면 족합니다. 사도는 왜 오직 십자가입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설교 내용이 달라집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 전도자들과 신자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독립된 종교로 출발하기보다 오히려 유대인 안에서 예수 전도 운동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짓된 메시아로 알고 십자가에 처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말씀은 신명기 21:23절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말씀에 따라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므로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그 메시아를 따랐습니다. 이 점이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었습니다. 


주후 40년쯤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인종과 지역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까지 확산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관계, 이방인들과 관계 등이 커다란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지식, 신앙과 믿음, 복음 선포 형식에 대한 문제가 늘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각 지역에, 교회들에 전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원래 유대인으로 유대교가 믿은 하나님과 구원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과 성령의 체험을 통해 예수가 구약이 약속하고 종말에 오실 그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약속된 종말론적인 성령이 이미 오셨으며, 예수와 성령을 통해 일찍이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새로운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계시를 받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이 아닌, 세상의 지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만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하나님 백성의 신분과 삶을 결정한다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런 복음 선포 앞에 이방인들이 교회에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나 목회자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오직 예수 십자가’, ‘오직 성령’ 등으로 강조합니다. 강조점에 따라 교회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목회 스타일이나 설교 스타일이 달라집니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유대주의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하되 그 강조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였고 구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지식, 구원 등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론 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복음을 선포합니다. 이런 복음 선포에 유대인들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 의해 바울은 이단인 셈입니다. 헬라 철학에 의하면 이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유대인들과 다르며, 이방 헬라 철학의 지혜와는 달랐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이를 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구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지식과 계시, 구원은 성령이 함께하지 아니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예수를 증거하고 믿게 합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는 성령께서 함께한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은 참으로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계시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학습된 이론에 의한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은 사건이었습니다. 교회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는 내용을 왜 무엇 때문에 교회에서 해야 합니까?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교회에 몰려듭니다. 그러한 교인들에게 세상의 이야기로 설교할 때 교인들은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3. 설교자(전도자)의 삶과 행동(3-5)


첫째,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3).


본문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주로 노예였거나 현재 노예인 자들이었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으로 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들 앞에만 가면 두렵고 떨렸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전혀 힘과 권력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 앞에 서기만 하면 ‘두렵다’, ‘떨린다’라는 말은 얼마나 그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힘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힘은 인간적인 힘입니다. 이런 힘은 하나님 앞에 무너질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힘은 하나님의 힘이 아닙니다. 사도는 자신이 철저히 낮아지고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이 약해질 때, 자신이 증거한 복음이 많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함에서 온전하여 짐”을 확신했습니다(고후 12:9). 고린도 후서 12: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 짐의 원리입니다. 내 능력이 약할 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나의 여러 약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점과 고난을 수치스러운 결점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을 높이면 높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 가려집니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가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더 크게 드러납니다.


복음 선포자, 설교자, 전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앞에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인간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삶에 배 있어야 합니다(4).


본문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합니다. 사도가 전한 말이나 선포한 것들은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들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설교자, 복음 선포자는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유능한 설교자는 삶의 전 과정이 설교의 준비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늘 설교를 준비하여야 합니다. 골방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 준비가 습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설교 준비, 성경 연구를 아예 포기한 설교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 대필자를 둡니다. 이들은 ‘목회 비서’로 활동합니다. 본인이 설교를 작성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작성해 준 설교 원고를 강당에 가지고 올라가 설교합니다. 설교는 늘 준비하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진행되어야 합니다. 준비하여야 합니다.


셋째, 오직 성도들을 생각하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5).


본문 5절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는 것은 성도들의 믿음을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두게 하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늘 성도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온전한 신앙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 희망과 비전은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비전과 희망을 위해서 복음을 연구하고 그 복음을 설교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복음이 성도들을 힘있게 합니다. 세상을 능력있게 살아가는 힘과 역동성이 생긴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교인들은 경제 이야기, 정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마음속에 갈급함이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절규가 있습니다.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정신을 가지고 나가서 또 다른 복음 증거 자가 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영적인 연약함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담대하게 세상 가운데 나아가서 생명의 말씀을 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삶의 모든 것들이 다 변화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헛된 껍데기를 벗어버린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말씀한 세상의 지혜는 빈껍데기입니다. 이를 벗어던지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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