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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 발명 … 종교개혁 확산의 길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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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단

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 발명 … 종교개혁 확산의 길 열어

면죄부⋅비판문 모두 찍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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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517년 10월 31일에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위해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정문에 붙였다.

이같은 반박글이 활판인쇄술에 의해 대량 인쇄되어 불과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에 퍼졌다. 이는 구텐베르크 활판인쇄술 발명 때문이었다. 아이로니컬한 일은 그가 처음 제작한 인쇄물 중에는 면죄부도 있었다는 점이다.

그간 필사에 의해 전해오던 기록들이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발명으로 인해 새로운 활자 인쇄 문명과 더불어 종교개혁이 각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스타인버그(Steinberg, S. H.)는 「인쇄의 5백년」이라는 책에서 “정치⋅법률⋅교회 그리고 경제에 관한 일들과 사회학적⋅철학적⋅문학적인 운동도 인쇄술이 끼친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발명한 15세기 이전에는 책 만들 때 양피지에 필경사들이 손으로 일일이 기록했다. 양피지는 값이 비싸 사민들이 갖기 힘들었으며, 가축 한 마리에서 양피지를 4장밖에 얻을 수 없었다.

성경 한 권을 만들려면 양피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200~300마리의 양이나 송아지를 도살해서 가능했다. 1200쪽짜리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필경사 두 명이 꼬박 5년을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활판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보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면죄부 반박 논리를 널리 퍼뜨려 종교개혁의 불길에 확산시키는데 계기가 되었다.

16세기까지 독일은 지역별 언어 차이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명으로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한 독일어 성경은 독일 전역에 표준어로 정착되면서 확산되었다.

독일어 성경은 사제들의 성경 독점이 해체되는 결과를 맞이하였다. 성경이 널리 보급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왜곡되지 않는 진리가 선포되었다.

루터는 면죄부 반박문을 발표한지 3년 후에 발표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 시대」(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를 비판하고 있다.

예수께서 새우신 성례는 오직 성찬과 세례의 두 가지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모든 신자들은 더 이상 사제의 중보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구약시대 제사장 제도는 장차 오실 제사장으로 오실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종교 개혁의 원리로써 만인제사장주의는 “사제가 나와 너 사이에 중보가 된다”거나 “하나님과 나 사이에 중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반어법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교회의 계급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논리적 근거로 만인제사장을 주장하였을 뿐 우리들이 사제의 중보를 받을 필요가 없이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만인 제사장 개념이다.

만인제사장이 계급구조를 타파하고 성경적인 교회 운영을 기초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루터는 평등은 기능과 능력의 차이까지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태두리 안에서의 평등을 의미하였다.

직위의 기능적인 면이나 사역하는 형태에 따라 부여된 칭호를 무시하고 이를 계급구조로 전면 부정하면서 목사와 장로, 집사, 일반 신자도 다 평등하다며 설교도 교인들이 할 수 있다거나 제직회나 공동의회도 집사가 의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들이 본 교단 산하 교회의 일부 집사들이 주장한 내용을 직접 들으면서 교회정관법을 제정하려 할 때 결국 포기한 경험을 갖고 있다.

루터는 영적, 혹은 세속적인 무정부주의를 마귀적인 것으로 보았고, 모든 혼란이 무정부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농민 전쟁 때에 농민들이 보여준 폭력적 무정부주의를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사회 질서를 위해 정부가 필요한 것처럼, 교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영적인 정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루터의 사상은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지배하여야 한다는 ‘오직 성경 사상’, ‘만인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는 개념의 ‘만인제사장주의’,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 질서를 유지를 위해 교직자와 직원 제도를 세우셨다는 사상 등은 결국 장로교회 정치사상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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