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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기념주일] 부활신앙(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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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기념주일] 부활신앙(고전 15:58)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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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내가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행한 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부활과 함께 드러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나중에 우리가 부활할 때에 부끄러운 부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 문제의 원인,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받은 은사를 받았지만 또한 많은 문제로 분쟁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보통 10가지 정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복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우리 육체의 부활, 즉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문제의 원인은 부활에 대한 잘못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영적인 부활을 믿었습니다. 영적인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부활을 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남녀 구분이 따로 없다고 믿었습니다. 즉 기존의 모든 질서에 구애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30절에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미 영적인 부활을 했으므로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남녀 구분이 필요 없으며, 기존의 사회적 질서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의 부활, 몸의 부활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2. 기독교 신앙의 중요 핵심 가운데 하나가 육체의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2천년 동안 많은 교리들이 발전되었습니다. 그러한 교리로 인해 성경을 이해하는 폭이 발전되었습니다. 성경 이해와 더불어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높은 경지의 이해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리와 세계관에서 육체의 부활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게 높습니다. 


세계관이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원리를 말합니다.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부활입니다. 그 부활 중에서도 육체의 부활입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부활을 전면 부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두개인이었습니다(마 22:23). 마태복음 22: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부활을 인정하되 몸의 부활은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역시 몸의 부활은 부정하고 영혼의 부활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17절에 보면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사람이 “육체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적인 부활”을 가르쳤습니다. 육체는 속되고 영은 거룩하다는 영지주의 영향으로 육체의 부활을 무의미하게 보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육체의 부활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자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육체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흥청망청 삽니다. 불신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육체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방식은 다릅니다. 고대의 에피쿠로스학파는 생의 특별한 목적이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한 쾌락을 누리는 것이 그나마 최고의 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쾌락주의의 밑바탕에는 어김없이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생을 전부로 보았고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소멸되어 없어진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 외에는 달리 추구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의 부활이 없으면 반드시 쾌락으로 떨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5:32절에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사도 바울은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이 세상을 될대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면 복음의 가장 중요한 교리 전부를 다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육체의 부활이 없다면 믿는 자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 몸으로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 헛것이고”(v.14),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v.14), “사도 역시 거짓 증인이 되고”(v.15), “우리의 죄 씻음도 다 쓸데없는 짓이고”(v.17), “이미 죽은 자들은 땅 속에서 썩어져 소멸될 뿐”(v.18)이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육체의 부활을 부정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여러분, 육체의 부활은 우리 생애의 핵심 가치입니다. 가정 중요한 것입니다. 심판과 상급, 천국과 지옥 등은 모두 육체의 부활이 있어야 의미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데, 헌신이니 충성이니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고린도교회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많았습니다. 남다른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졌습니까? 그 문제의 원인은 결국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은 영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입니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체 부활로 제자들이 친히 만져보았습니다. 500명이나 되는 제다들이 친히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몸으로 나타나셨는데,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예수님은 지금도 몸을 가지시고 하늘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사람의 특징은 육체성에 있습니다. 


②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예표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인정하면서도 죽은 성도들이 육체로 다시 산다는 것은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사람이었으므로 사람이 다시 몸으로 사는 법이 없다면 그도 다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우리들의 몸의 부활도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부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의 부활의 양식과 특징을 보면 우리의 부활이 어떠할지를 정확히 알게 하는 모델입니다.


③ 부활은 심고 거두는 법칙을 따릅니다. 바울은 부활을 씨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콩을 심은데 콩이 나고 팥을 심은데 팥이 나옵니다. 첫째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이 몸은 이 땅의 삶에 국한된 몸이었고 반드시 한번 죽어야 합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물려받은 우리의 몸은 죽을 때 씨처럼 땅에 묻히고 썩어집니다. 몸이 땅에 심겼으므로 다시 부활할 때는 반드시 몸의 부활로 거두는 것입니다. 몸을 심었으니 몸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는 다시는 썩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 신령한 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부활합니다.


부활을 통해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물려받을 몸은 영적인 세계에 살기에 적합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몸은 죽을 때 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 시에는 강한 것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은 죽음에 이르는 몸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부활의 몸, 다시는 죽지 않을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몸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요구되는 사건입니다. 즉 몸의 부활이 필요한 이유는 장차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몸을 입기 위해서입니다. 

고전 15: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기에 적합한 몸을 지녔고 새는 창공을 날기에 적합한 몸을 가졌습니다. 현재 우리의 죽을 몸 그리고 썩을 이 몸은 이 땅에 살기에 적합한 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몸과는 다른 더 나은 몸 곧 신령하고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고 하늘의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그런 몸이 요구됩니다.


바울이 말씀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재의 몸이 그 속성의 변화를 거쳐야 한다는 점과, 그 변화의 중심은 부활이라고 말씀한 것에 있습니다.


실로 부활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더 낫고 영광스러운 몸을 입는 사건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더 나은 몸을 받기 전에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저주도 심판도 아니라 몸의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의 경험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4. 부활은 우리의 몸의 열매를 드러낼 것입니다. 


사람은 더 나은 몸으로 영원히 살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뿐이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애는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반드시 더 나은 몸으로 부활하고 그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몸으로 행한 모든 일도 부활의 아침에 하나님 앞에 모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나의 몸과 함께 나의 역사와 생각과 행위가 함께 부활에 이르는 것입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되는 대로 살고 부패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잘한 일은 영원히 잘한 일이 되고 여기에서 잘못한 일은 영원히 잘못한 일로 남습니다.


이생에서 내가 행한 일은 없어지지 않고 부활과 함께 모두 드러납니다. 부활을 믿는다면 세상에서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쓰고 그렇게 살면 부끄러운 부활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의 관한 강론을 마치면서 그 결론을 “주의 일에 힘쓰라”는 헌신의 권면으로 끝맺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전 5:60).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를 위한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결론

 

우리가 교회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십시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자랑하려는 동기로 인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주를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의 동기는 오직 부활신앙입니다.


우리 모두는 몸의 부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1).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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