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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1] 엘리야의 피신과 하나님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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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1] 엘리야의 피신과 하나님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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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왕상 19:1-21


열왕기상 18:1-46절 까지의 말씀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主)가 바알이냐 여호와냐 라는 두 신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역자로 삼아 바알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주가 아니라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애굽에서의 430년, 광야에서의 4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잊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살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할 것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한 징계의 압박으로 언약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사사시대 400년이 넘는 기간 줄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통하여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엘리야를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님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은 19장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주님으로 고백으로 자들에게 대한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한 반대로 여호와의 주님되심을 거부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 피신함(1-8절)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였습니다. 이같은 이야기가 이세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들을 보호해 주는 보호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적인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의 보호자로 자처한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의 적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세벨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때 엘리야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 속에서 우리는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


첫째, 거짓선지자의 대모였던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는 음모는 무엇을 의미합니까?(1-2절)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끌어 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방해꾼이 등장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이 계속 진행되는 중에 사탄 마귀의 장난과 방해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전형적인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이세벨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것은 결국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중단시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사탄의 어두움의 영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무너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는 음모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음모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탄 마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들을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세벨은 절대로 엘리야를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낙심하며 죽기를 구합니다(3-4절) 


엘리야는 이세벨의 음모를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다 광야 로뎀나무 아래서 그는 낙심하며 죽기를 구했습니다. 4절에 보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엘리야도 인간인지라 낙심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있었으면 죽여달라고 했겠습니까? 모세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사명자에게는 때로는 고독과 낙심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사명자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힘이 되어 주고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에게도 남모른 이런 외로움과 고독과 낙심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겠죠. 그러나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절망과 좌절과 낙심 가운데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낙심해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음식과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5-8절).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계속 낙심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힘을 잃고 낙심할 때 우리 주님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위로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해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먹을 음식을 제공해 줍니다. 힘을 얻게 해 주십니다.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 감당할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실패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 때문에 먹을 것을 주십니다. 사업의 번창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여호와께서 피신해 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심(9-14절) 


본문 9절에 보시면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무서워서, 두려워서 도망을 쳐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의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실패의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와 주셨습니다. 두렵고 무서워 떨고 있는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오셔서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언제까지 그런 절망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 있어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어야 하고 신세타령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반문하십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우리들도 계속해서 그런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백부장에게 찾아오시고 삭개오에게 찾아오셨던 우리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 오셔서 언제까지 그렇게 울고만 있을 것이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것은 그냥 찾아오신 것은 아닙니다. 사명을 주시고 축복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을 축복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에 충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여호와께서 대적에 대한 심판을 약속하고 위로함(15-18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찾아오셔서 축복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에게는 심판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심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람왕을 세워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약속이 임합니다(15절).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가서 아람왕 하사엘을 세울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이며 하나님의 대적인 아람왕을 세우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배반할 때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를 강성케 하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말씀대로 아람 왕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오게 됩니다(왕하10:32-33).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징계하실 때 징계의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주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력들에게 강성하게 합니다. 그렇게 강성한 세력을 회초리로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에 예후 왕의 반란과 쿠데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16절).


이제 이방 대적을 통한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세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심판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후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 말씀대로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예후의 반란과 쿠데타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심판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후의 쿠데타로 백성이 죽게 되는 비극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한 왕을 주신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권력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도자가 악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선지자 엘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약속합니다(17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인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심판을 가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시면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말씀합니다.


넷째, 그러나 심판중에서도 남는자에 대한 긍휼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며 위로합니다(1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토록 패역하고 범죄한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다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를 남겨 긍휼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합니다.


4.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엘리사를 세우십니다(19-21절).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다메섹 광야로 가는 도중에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 곁을 지나가다가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엘리사에게 걸쳐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자신의 옷을 벗어서 자신에게 걸쳐 주는 것은 예삿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옷은 바로 예언자의 옷입니다. 엘리사에게 그 예언자의 옷을 걸쳐 주는 것은 자신을 부른 것으로 알았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엘리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21절 말씀에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라고 합니다. 이제 완전히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는 장면입니다.


엘리사가 부름 받는 장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6절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라고 합니다.

 

‘아벨므홀라’라는 동네 이름과 사밧의 아들인 엘리사라는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선지자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엘리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부인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생업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9장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무슨 교훈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적대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으로 응수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런 적대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귀한 종들을 남겨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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