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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론 3] 물 공급과 모압을 치게 하신 하나님(왕하 3:1-27)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2장 말씀을 통하여 “선지자 사역을 시작한 엘리사”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승천하고 난 다음 그 후계자로 엘리사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 엘리사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게 하시려고 선지 생도들은 물론 여리고 성 사람들에게 물을 깨끗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 선지자를 조롱했던 젊은이들을 저주하자 곰이 나타난 42명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조롱한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조롱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게 하였습니다. 예언하게 하였습니다. 1. 여호람이 왕이 되어 여로보암 길로 행했습니다(1-3절). 북쪽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하시야’는 햇수로 2년 동안 왕으로 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가 아들이 없이 죽게 되자 그의 형제 중에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왕상22:51, 왕하 1:17). ‘여호람’이 왕이 되었을 때 남쪽 유다 왕은 ‘여호사밧’이었습니다(3:1절). 이 여호람은 북쪽 이스라엘 왕이 되어 12년 동안 치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알의 주상은 제하였다”(2절下)고 합니다. ‘여호람’은 바알의 주상을 깨뜨렸지만, “그러나 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합니다(3절). 여로보암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하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하나님께 범죄했던 모든 왕들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이후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이 죄에서 떠나지 않는 상황을 두고 “여로보암의 길, 혹은 여로보암의 범한 죄의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땅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일이 있습니다. 직분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일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청지기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평가하실 때 아무개는 죄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나쁜 흔적을 남기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아무개처럼 되지 말자”라는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의 모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듣습니다. “교회 다니는 아무개처럼 될까 봐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라는 불행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봅시다. 무엇 무엇은 잘했는데 “그러나” 그의 인생 결론은 실패였고 죄짓는 데만 앞장섰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회개해야 합니다. 2. 모압을 치려 했으나 방해물이 등장합니다(4-12절). 당시 나라는 도시국가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힘이 약한 국가는 힘이 강한 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모압이라는 나라는 아합왕 때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모압 왕 메사는 주로 양을 쳤습니다. 새끼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바쳤습니다(4절). 그러나 아합왕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게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만 것입니다. 모압이란 어떤 민족입니까?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큰딸과 관계를 맺어 태어난 후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백성의 계열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섬겨야 하는 종들임은 틀림없습니다. 모압왕 ‘메사’가 북쪽 이스라엘을 배반하자 이스라엘 왕 ‘여 호람’은 남쪽 유다 왕인 ‘여호사밧’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모압을 치는데 함께 해줄 것을 간청합니다. 그러자 남쪽 유다 왕은 우리들과 당신들은 한 형제이지 않으냐고 하면서 기꺼이 모압을 치는데 함께 동참하겠다고 합니다. 에돔 왕도 이 전쟁에 동참합니다. 이렇게 하여 북쪽 이스라엘 군대와 남쪽 유다 군대가 적진을 향하여 들어갑니다. 그런데 7일쯤 행군해 나가다가 군인들과 각종 짐승에게 먹일 물이 없습니다(9절). 사실 군인들이 전쟁을 한다거나 훈련할 때 물은 필수적입니다. 군인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모압을 치러 가는데 그만 물이 없습니다.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은 큰일 났습니다. 여호람왕은 이 상황은 곧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모압의 손에 붙여 버리시고자 하는 심히 위급한 상황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왕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남아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여로보암과 같이 죄의 길을 따르게 되었지만 이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를 찾았습니다(11절). 그때 그의 신복이 엘리사가 여리고성 물을 깨끗게 한 사실을 기억하고 왕에게 엘리사가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유다 여호사밧 왕과 에돔왕이 함께 엘리사에게로 갑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많은 문제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장애물이 등장할 때 우리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엘리사가 에돔편으로부터 물이 나오게 합니다(13-20절). 여호람은 북쪽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합왕은 거짓 선지자들을 많이 거느렸습니다. 또한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 역시 거짓 선지자들의 대모 노릇을 해 왔습니다. 이 이세벨은 여호람의 어머니입니다. 북쪽 여호람 왕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도움을 호소해 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미 여호람의 부친과 모친이 얼마나 하나님께 악한 짓을 했던지 상관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13절). 그러나 엘리사는 유다왕 여호사밧 때문에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합니다(14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의인의 희생을 통하여 거룩하지 못한 죄인을 살려주십니다. 남쪽 유다는 의인의 계열입니다. 언약의 계열입니다. 이 언약의 계열을 통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남쪽 유다 백성을 지키시고 보고해 주십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은 그와 정 반대 계열입니다. 남쪽 왕에 의해서 북쪽 왕이 문제 해결을 받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인 여호람은 분명히, 그리고 빨리 이 사실을 알았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지금은 무엇 때문에 버림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역시 어떻게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다같이 3:15-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의 손이 엘리사 위에 있더니 그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가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이란 물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일과 모압을 그들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쉬운 일이라고 엘리사 선지자는 말씀해 줍니다(18절). 20절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과 희망의 소식입니다.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하나님 앞에 제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모든 전쟁이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때 그 전에 반드시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 제사를 통해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임했습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아침에 하나님께 소제를 드리고 난 후에 에돔에서 물이 흘러 그 땅을 넘쳤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이제 모압을 붙여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응답해 주십니다. 그 응답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을 받을 때 더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교만 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교만 병의 결과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4. 이스라엘이 유다의 도움으로 모압과 싸워 승리합니다(21-27절). 모압 사람들은 여러 왕들이 자신들을 쳐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사람이 모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해가 물 위에 비쳐서 반대편 물이 온통 피와 같이 붉게 물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피로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쳐들어온 왕들이 자기들끼리 싸워 피를 흘렸을 것으로 생각하고 사기가 충천하여 전쟁하게 되었습니다(22-23절). 그러나 막상 이스라엘 진 앞에 이르게 되자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모압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패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 승리였습니다. 패배의 눈앞에 놓인 모압 왕은 마지막 수단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인 ‘그모스’에게 자기를 이어 왕이 될 아들을 산 제물로 불태워 바치게 됩니다(27절).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놀라면 모압 왕을 포위했던 포위망을 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종교란 참으로 무섭습니다. 역사를 보면 종교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에돔이 왕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에게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산 채로 불태워 죽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것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의 비극입니다. 이런 비극적인 심판은 이다음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단행하실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이 두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20절 말씀과 2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0절 말씀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과 희망의 소식입니다.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25절에는 대적인 모압에 대한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 성읍들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매꾼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의 복된 소식이 있습니다. 그 소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심판의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 심판은 좋은 소식일 수는 없습니다. 절망의 소식이요, 패망의 소식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그 기쁜 소식이 곧 우리들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듣지 않고 무시할 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무시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열심히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예언과 선포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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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론 2] 선지자 사역을 시작한 엘리사(왕하 2:1-25)지난 시간에 열왕기하 1장 말씀을 통하여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아하시야는 그토록 악했던 아합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북쪽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졌을 때 병이 걸렸습니다. 자신의 병을 이방신에게 묻는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 왕이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이방신에게 묻는 행위는 하나님을 거부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습니다. 여가서 저주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반기를 든 하나님의 적이라는 의미입니다. 1. 엘리야가 사역을 마치고 승천합니다(1-14절). 하나님께서 그동안 엘리야를 통하여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 왔습니다. 엘리야의 활동은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저주를 선포하는 엘리야의 활동은 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열왕기하 2장에서 엘리야의 사역이 마쳐지고 있습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승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승천하게 하시기 전에 그를 길갈에서 벧엘로, 다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에 이르게 합니다. 이런 여정을 이동할 때 꼭 엘리사를 동행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엘리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엘리야를 따랐기 때문에 그가 선지자로 선택을 받아 능력있게 쓰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선택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부르실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 마지막 여정을 동행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전할 선지자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벧엘과 여리고를 지날 때에 그곳에는 특별히 선지자의 생도들이 나타납니다. 그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선생인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엘리사 역시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생도들에게 나도 안다고 하면서 조용히 하라고 타일러 줍니다(3,5절).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요단에 이르게 하시고 그 요단을 갈라 건너게 합니다. 그때도 엘리사가 엘리사와 함께 요단을 건넙니다. 그 광경을 여리고에 있는 선지생도 50명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 생도들에게 엘리사가 엘리야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요단을 건넌 다음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9절)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는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내가 하나님께로 갈 때 그것을 보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그때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절)고 합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이후 그이 겉옷이 떨어졌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을 가른 다음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12-14절). 이제 선지자의 옷이 엘리사에게 전해졌습니다. 엘리야를 이어서 엘리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 받은 장면이 기록된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면서 등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 받는 모든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선지자가 세워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자로 감당하기까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세심한 배려가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의 모든 직분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배려가 있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생도들이 엘리야를 찾습니다(15-18절). 여리고의 50명의 선지생도들은 회리 바람과 엘리야가 승천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에게 옮겨졌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선지생도들이 엘리사의 특별한 소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엘리사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15절). 늘 존경은 우리 신앙인의 세계에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질서나 사회에서의 위계질서를 절대로 무시하면 안됩니다.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히 여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존경을 받으려고 노력도 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존경하려는 자세와 태도가 갖추어져야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승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생도들은 엘리야가 승천한 것을 깨닫지 못했나 봅니다. 단순히 엘리야가 다른 장소로 옮겨진 줄로 알았습니다. 열왕기상 18:12절에서 오바댜가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의 영이 엘리야를 그들이 알지 못하는 장소로 옮겼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엘리사에게 찾을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엘리야를 찾는 일을 단념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도들이 너무나 간청하는 바람에 무정함을 보이지 않기 위하여 허락합니다. 엘리사가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찾지 못하고 사흘 후에 돌아옵니다. 그 이후로 엘리사의 말은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졌고 생도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역시 이런 존경받은 주의 종이 필요로 합니다. 이 말은 너무나 많은 존경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좋은 성도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죄를 범할 때 지도자를 먼저 심판하였습니다. 악한 왕을 세워 버렸습니다. 악한 왕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그 백성을 심판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3. 엘리사가 여리고성 물을 소금으로 깨끗케 합니다(19-22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물이 깨끗하지 못하면 사람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물을 통해서 대 재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즉 물이 더러워서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죽습니다.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물에는 곡식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 나라는 물을 그렇게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환경 공해 때문에 물 때문에 걱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을 끌어오려고 할 때 지역마다 서로 물을 주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본문 역시 당시 여리고에는 물 때문에 걱정을 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그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라고 하소연합니다. 물이 좋지 못해서 곡식의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진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때 번성함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서 떠나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풍요를 거두어가셨습니다. 지금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로 하여금 그 물을 깨끗하게 해서 다시 원상 회복되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이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물을 깨끗하게 해 준 덕에 “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21절)고 했습니다. 결국 엘리야가 이 물을 깨끗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21절)라고 하시므로 고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물에 소금을 집어넣자 좋아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물에다 소금을 넣으면 물은 더 나빠집니다. 그런데 물이 좋아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소금을 넣었으니 물이 더 나빠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물이 좋아졌다는 것은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을 보여줍니다.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할 때 나무에 물을 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불이 붙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므로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엘리사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입증해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바알이 그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풍요를 가져다주신 분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그들의 황폐함과 가난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축복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풍요를 가져다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들이 잘 믿어야 하겠습니다. 4. 엘리사 선지자를 조롱하다 저주받는 자들이 있었습니다(23-25절)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는 길에 많은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여기 젊은이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닙니다. 길에서 그들과 마주쳤습니다. 아마 그들은 바알의 추종자들 내지는 바알의 선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를 그렇게 경멸스럽게 조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그 젊은이들이 엘리사를 향하여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23절)고 조롱했습니다. 이 조롱은 엘리야가 승천하여 올라갔는데 엘리사 당신은 왜 승천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도 엘리야처럼 위대한 선지자라면 올라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조롱입니다. 대머리라는 별명은 당시 추방자로 여겨졌던 문둥병자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문둥병자는 머리를 짧게 깎았습니다. 이를 두고 대머리라는 별명으로 조롱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머리는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것을 염두 하면서 경멸의 표시로서 대머리라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경멸하며 조롱하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립니다. 그때 수풀에서 곰이 나와 42명을 죽였습니다. 곰이 어떻게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에게 내려진 줄 알고 물어 죽여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동물까지라도 이용해서 심판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사의 저주는 자신의 자존심에 때문에 내린 저주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사가 그렇게 했다면 저주는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자를 경멸하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이 일 후에 엘리사는 사마리아로 돌아옵니다.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앞으로 이곳에서 선지자의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약의 역사를 이어가셨는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필요로 하는 종들을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증거하고 말씀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종들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열심히 보내시고 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영접하고 주님의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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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 강론 1]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왕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왕하1:1-18)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마지막 말씀인 22장을 살펴보았습니다. 22장을 통하여 “북쪽 이스라엘 아합왕의 죽음과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의 통치”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 그토록 하나님께 범죄했던 아합왕이 죽습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어떤 죽음입니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는 아합왕의 죽음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거룩의 반대 개념인 죄를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쪽 유다의 왕인 여호사밧의 통치도 보여줍니다. 아합왕에 비해서 그는 선한 정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정직하게 정치를 했지만, 그 역시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북쪽 이스라엘에 있지 아니하고 남쪽 유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는 그들의 죄악대로 심판받지 않고 은혜가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1. 엘리야가 바알세불을 의지한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를 저주합니다(1-4절).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습니다. 이때 왕은 자신의 이방신이 에글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엘리야가 아하시야의 심부름꾼에게 하는 말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3절)고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방신에게 자신의 병을 묻는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합니다. 그 저주는 ① 아하시야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 병은 결코 낫지 않겠다고 합니다. ② 하시아야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때로는 그 하나님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 하나님을 무시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무시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의 아들이 장가를 가기 위해서 선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예수를 믿지 않는 처녀와 선을 보았습니다. 불신자와 선을 본 것도 문제지만 궁합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가정이 어찌 장로의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분은 일찍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장로직를 사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병에 들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가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귀신에게 자신의 가정과 장래를 묻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버린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사람을 버릴 것입니다. 2. 엘리야의 저주를 아하시야에게 전합니다(5-8절). 아하시야의 심부름꾼들이 엘리야가 말씀한 그 무서운 심판의 소식을 왕에게 전합니다. 아하시야 왕은 분명히 자신의 잘못을 엘리야 선지자의 경고로 뉘우치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아하시야 왕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한 경고가 전달되었다는 것은 복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회가 주어질 때 우리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나단 선지자의 경고의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들입니다. 그때 다윗왕은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이런 말을 합니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심판받아 지옥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d여 죄 용서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할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주어진 경고는 결코 기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온다고 해도 우리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더 유익한 좋은 일들과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하나님의 종들을 그에게 보내주시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보냅니다. 그 종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하고 권면합니다. 그때 비록 내 자신은 그 권면과 경고가 마음에 내키지 아니할지라도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권면하고 경고하면 기분 나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별별 모함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외면한 아하시야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3. 엘리야가 직접 왕에게 책망하고 저주합니다(9-16절). 엘리야가 왕의 심부름꾼에게 저주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전달하자 왕의 기분이 좋을리 있겠습니까? 왕은 50명의 군대와 장교를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체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를 왕궁으로 압송하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50명의 군대와 장교가 엘리야에게 나아가 왕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요구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군대를 멸절합니다. 다음에 또 똑같은 수의 군대를 보냅니다. 전과 같이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전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은 왕이 했는데 그 왕의 심부름꾼들이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받아 죽는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왕 뿐만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하였습니다. 당연한 하나님의 심판의 불입니다. 세번째 똑같은 군대를 보냅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왕하1:15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내려가라.”은 말씀이 떨어집니다. 엘리야가 곧 일어나 그들과 함께 사마리아 왕궁에 있는 아하시야에게 갑니다. 엘리야가 왕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다같이 16절을 보시겠습니다.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의 종 선지자는 왕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버렸던 왕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게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권력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종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4.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의 저주의 예언대로 죽습니다(17-18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하시야왕은 그의 범죄 때문에 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루어졌습니다. 아하시야가 죽습니다. 아하시야를 죽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아합왕에게 내린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아합왕의 아들 때에 그 가문이 끊어지도록 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아하시야는 아들이 없는 고로 여호람이 왕이 됩니다(17절). 열왕기서는 단순히 왕들의 전기를 이야기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왕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왕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공의의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또한 무섭고 두려운 공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남쪽 유다왕들은 반드시 유다지파의 혈통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아들 없이 죽을병에 걸렸으면 아들을 낳기까지 생명을 연장시켜 주기도했습니다. 그 좋은 예가 히스기야 왕의 15년 생명연장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유다 지파의 혈통을 통해서 왕들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유다 지파가 구원의 반열로서 장차 예수님이 그 지파를 통해서 오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밖의 계열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왕은 한 혈통 중심으로 이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목과 쿠데타로 정권이 바뀝니다. 아들이 없어도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심판대로 대를 잇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바로 아하시야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달랐습니다. 묵상과 교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랜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현재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열심히 보내셔서 우리들에게 권면합니다. 경고합니다. 그 권면과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분 나빠하거나 자존심 상했다고 교회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멀리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하나님의 종들을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살아 계시고 선악간에 우리들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들을 지켜보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들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열매가 있기 마련입니다. 믿음의 특성은 믿음의 열매가 있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라고 해 놓고 그 열매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그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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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4] 북왕조 아합왕의 죽음과 남왕조 여호사밧의 통치본문 / 왕상 22:1-53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21장 말씀을 통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왕”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나봇은 조상들로부터 땅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과 자비가 증거되는 땅입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그와 같은 약속의 땅을 자신의 탐욕을 위해서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내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하여 “거짓으로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은 제목으로 영문 밖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죄없는 나봇이 죄인으로 등장한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런 희생 너머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 섭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지 못한 자들에게 심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심판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선지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22장은 열왕기상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됩니다. 무려 열왕기상 16장에서부터 언급된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에 대한 기록이 22장에서는 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즉 심판의 종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구약성경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신 심판의 모습과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1. 북쪽 이스라엘 아합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40절) 열왕기상 22장 전반부에서는 아합왕이 죽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다죽습니다. 그러나 아합의 비극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합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야기가 40절까지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1-40절까지의 모든 말씀은 아합왕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북쪽 이스라엘 아합에게 남쪽 유다 여호사밧왕의 개입으로 전쟁이 진행됩니다(1-4절). 결국 이 전쟁의 결과로 아합왕이 죽게 됩니다. 어떤 전쟁이냐면 아람과의 전쟁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아람과 전쟁이 없이 3년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 때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왕인 아합에게 제의합니다. 그 내용이 3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의 왕의 손에서 도로 찾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길르앗 라못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었던 땅입니다(신4:43,수2138). 그러나 지금은 아람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 땅을 함께 빼앗자고 유다왕이 아합에게 제의합니다. 이때 북쪽 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은 남쪽 유다인 여호사밧왕에게 우리와 함께 그 땅을 빼앗자고 합니다. 그러자 유다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4절). 둘째, 유다의 여호사밧왕은 아합왕에게 아람과의 전쟁을 위해하나님께 물어 보라고 합니다(5-12절) 아합 왕은 선지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선지자들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한결같이 그 거짓 선지자들은 아합왕에게 좋은 말로 아첨하는 자들입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이 아합왕에게 아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해 줍니다(5-6,10-12절). 옛날이나 지금이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권력자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는 말만 합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합니다. 우리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참선지자 미가야의 예언과 그 예언대로 아합왕이 죽습니다(13-40). 남쪽 유다 왕인 여호사밧은 아합왕에게 좋은 말로만 예언해 준 400명 외에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자신에게 좋지 않게 예언하는 미가야 선지자가 있음을 이야기해 줍니다(8절). 사람을 보내어 미가야 선지자에게 예언해 달라고 갔습니다. 그 때 심부름하는 사람이 미가야 선지자에게 400명의 거짓 선지자와 같이 아합왕에게 좋은 말로 예언해 달라고 요구합니다(13절).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그런 청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합왕에게 거짓 영을 보내어 거짓으로 예언하게 하여 심판하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19-23절).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한 그런 본문은 아닙니다. 거짓말을 하는 심판의 영을 통하여 아합에게 거짓 예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에 대해 심판하실 때 거짓 선지자들을 우리들에게 보내셔서 바른 말씀에로 접근을 차단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미가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아람과의 싸움에서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언은 그들의 왕인 아합이 죽고 그 백성은 그 전쟁에서 후퇴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을 말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씀대로 아합왕은 죽고(35절). 백성들은 각기 자기 본향으로 돌아갔다고 말씀합 니다(36절). 넷째, 아합왕이 죽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51-53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아합이 죽었습니다. 이제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아합 대신 왕이 되었습니다. 51절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됩니다. 52절에 보면 그 아들 역시 “그가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의 길과 그의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라고 합니다. 아합왕의 아들인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남쪽 유다 여호사밧왕의 통치(41-50절) 지금까지 열왕기상 15:25절에서부터 22장 전반부(40절까지)까지 북쪽 이스라엘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행동에 관해서 살폈습니다. 그리고 그 악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무엇을 보여 주셨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22장 41절에서부터 부터는 다시 상황이 북쪽 이스라엘에게서 남쪽 유다로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5:24절에 유다왕 아사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5:24절에 보시면 “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라고 합니다. 본문은 이 부분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이 유다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호사밧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여 25년을 치리 했습니다. 유다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을 25년을 치리 했습니다(41-42절). 그는 북쪽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지 않고 정직히 행했습니다. 43절에 여호사밧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씀합니다. 43절에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는 정직히 행했지만 산당까지는 제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훗날 남겨 놓은 이 산당 신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망하게 하고 가시가 될 것입니다. 자녀들이 처음에 불순종하는 것을 그냥 두게 되면 나중에 그 휴유증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단호하게 신앙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둘째, 남색하는 자들을 쫓아냈습니다(46절). 본문 46절에 “그가 그의 아버지 아사의 시대에 남아 있던 남색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라고 합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성적으로 타락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성적인 음란으로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우리들은 이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우리들은 열왕기상 22장 말씀을 통하여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신 것이 무엇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역사를 말씀대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역사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모든 역사의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대로 움직여 가십니다. 하나님의 의도했던 대로 모든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심판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신실한 일꾼들을 부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심판과 구원의 최종적인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입니다. 약속대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재림으로 심판과 구원을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던 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주어질 것입니다. <열왕기상 강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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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3]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왕본문 / 왕상 21:1-29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20장 말씀을 통하여 “아합왕의 승리와 하나님의 저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아람 왕이 북쪽 이스라엘을 침략해 왔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왕은 아합 왕이었습니다. 그 아합 왕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진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있었습니다. 이는 아합왕이 회개하며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한 선지자를 그들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선지자가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예언합니다. 그 예언대로 북쪽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언제나 승리와 축복을 받을 때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합왕은 그것을 망각합니다. 그래서 저주가 임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본문 21장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아합왕이 그의 아내와 함께 어떤 죄를 범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다(1-3절). 아합왕은 이미 20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런 예언을 듣고 아합왕은 사마리에 있는 자기 궁으로 근심하며 돌아왔습니다(20:43). 이런 무서운 저주의 예언을 선지자로부터 경고로 받았다면 회개해야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기는커녕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탐욕을 부립니다. 자신의 궁 옆에 나봇이라는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에게 정당한 값을 주겠으니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아합왕은 그 포도밭이 자신의 궁 옆에 있기 때문에 “채소 밭을 삼게 하라”라고 합니다(21:2). 이 사건은 이런 문제가 개입됩니다. 나봇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입니다. 그 땅에는 자신들 조상들의 묘가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 25:23절에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또한 민수기 36:7절에도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입니다. 이같은 땅은 팔지 말아야 합니다. 혹 실수로, 극한 상황 속에서 팔렸다고 해도 가까운 친족은 그 밭을 사서 돌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나봇은 3절에서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이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정당한 값을 치러 준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아합왕은 하나님께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나봇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전 재산입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단지 채소밭 정도로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없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백성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왕의 자리는 백성을 섬겨야 하는 자리입니다. 아합왕은 바로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였습니다. 아합왕은 지금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가 이런 실수를 범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분이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그때 가진 자가 도움을 주겠다는 핑계로 자신의 탐욕과 탐심을 부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해야 할 임무를 거역하면 안 되겠습니다. 2. 이세벨의 사악한 음모 - 나봇을 죽인다(4-16절). 본문 5-6절 말씀을 보면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수중에 넣지 못하므로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가를 보여줍니다. 식사도 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악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것을 그의 악한 아내가 보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왕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줍니다. 아내가 남편 아합왕의 말을 듣습니다. 듣고 있는 이세벨은 그런 것 가지고 무슨 근심을 그렇게 하느냐고 합니다. 당장 그 포도원을 왕의 소유로 돌려놓겠다고 합니다. 현명한 아내라면 “그것은 당신이 잘못한 것입니다”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세벨은 더욱 악한 사람입니다. 모든 권력을 동원합니다. 권력뿐만 아니라 폭력까지를 동원합니다. 그래서 나봇을 죽이려고 합니다. 어떻게 죽입니까? 나봇이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10절)는 제목으로 죽입니다. 어떻게 죽입니까? 성문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죽입니다(10,14절).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죄 없는 나봇이 죄와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한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서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의인이 죄인에 의해서 희생을 당합니다.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고 영문 밖에서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치 어린양과 같은 희생을 당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에 의해서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거룩한 희생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들이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 말씀에서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엘리야가 아합왕과 이세벨을 만나 저주를 예언한다(17-26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을 당한 나봇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마치 가인에 의해서 아벨이 죽었을 때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하듯이 나봇의 희생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원한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 심판하실 것입니다. 저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동원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아합에게 저주를 선언하게 합니다(18-19절). 그 저주의 선언이 더 구체적으로 20절 하반절부터 24절까지 이어집니다. 20절에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20절).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했습니다. 21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 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22절에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라고 합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왕들처럼 그들이 범죄하여 여호와를 노하게 했습니다. 23절에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세벨에게도 개들이 이스르엘 성에서 이세벨의 시체를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24절에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합니다. 아합왕에게 속한 자들이 성읍에서 죽으면 개들이 그 시체를 먹을 것이요, 들에서 죽으면 공중의 새들이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로”(20절),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22절)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런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의 행동들을 보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모릅니다. 4. 아합의 겸비로 저주의 재앙을 아들 시대에 내리겠다고 한다(27-29절).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왕에게 책망하고 저주를 선포합니다. 그때 아합왕이 27절에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2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는 것은 아합왕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왕에게 심판을 거두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들 대에 내리시겠다고 합니다. 그런 심판과 저주의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길이 인내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를 치시고 저주하신다면 우리가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릴 때도 길이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여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기다려 주신 분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길이 인내하심을 시험하면 안 되겠습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아합왕은 자신들이 사는 땅은 이미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셨던 언약의 땅이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 언약이 깨어질 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땅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선지자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아합왕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야 함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은 새 언약이 있습니다.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가정생활, 사회생활, 교회 생활이 결정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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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2] 북왕조 아합왕의 승리와 하나님의 저주본문 / 왕상 20:1-43 지난 시간에 19:1-21절 말씀을 통하여 “엘리야의 피신과 하나님의 보호”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등을 돌리고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적대자들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계속 진행되게 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때로는 낙심과 좌절 가운데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하고 죽기를 간청한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하듯이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언제까지 그런 좌절과 실패 속에서 절망할 것이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엘리야를 보호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보호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본문 20장 말씀 역시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우리가 주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긍휼과 자비가 북쪽 아합 왕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람 왕인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공격해 오다(1-12절)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많은 전쟁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같은 전쟁 자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 전쟁을 통해 보여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과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러한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때로는 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그 전쟁을 통해서 승리라는 방식으로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전쟁을 통하여 언약 밖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적대자들에게 전쟁을 통하여 무섭고 두려운 공의의 하나님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아람 왕인 벤하닷이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을 포위해 옵니다. 여기서 아람이란 나라는 시리아를 의미합니다. 아람이란 시리아의 군대 이름입니다. 수도를 다메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 아람은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아람 왕이 사마리아를 쳐들어옵니다. 쳐들어와서 아합 왕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3절에 보시면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이때 아합 왕의 비겁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4절에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아합 왕은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거절하지 못하고 장로들을 모아 놓고 사태를 의논합니다. 그 때 장로들이 8절에서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왕은 아람 왕에게 거절합니다. 그러자 아람 왕은 공갈 협박과 위협을 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위기의 때에 아합 왕은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먼저 장로들을 모아 놓고 대책 회의부터 먼저 합니다. 혹 우리가 이런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먼저 기도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선지자의 예언과 이스라엘의 승리(13-30) 위기의 상황에 있는 아합 왕에게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선지자의 등장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등장해서 하신 예언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절입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아람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해 줍니다. 아합 왕이 능력이 있다거나 아합 왕이 거느린 군사가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를 아합 왕에게 붙여주시기 때문에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해 줍니다. 이러한 승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 여호와께서 누구이신지 알게 해서 아합 왕이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결국 16-21절 말씀을 보면 아합 왕이 아람 왕 벤하닷과의 싸움에서 크게 승리합니다. 21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 그때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크게 패한 아람 왕이 날이 밝으면 다시 아람 왕이 쳐들어올 터이니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22절). 드디어 선지자의 예언대로 아람 왕이 다시 평지에서 싸우려고 합니다(22-25절). 그러나 다시 싸우기 전에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다시 싸워도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그 약속 말미에 앞에서와 동일하게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8절)고 합니다. 선지자의 약속의 예언대로 아합 왕이 크게 승리하게 됩니다(26-30절). 29-3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님께서 아람 왕과의 전쟁에서 아합 왕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악한 아합 왕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은혜란 자신의 그동안의 악한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런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 기회는 자주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아합 왕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람 왕의 벤하닷의 많은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습니다. 그렇게 승리하게 함으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고 섬길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심으로 그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것도 두 번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이 과연 순종했습니까? 그래서 아합 왕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문 31-43절 말씀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3. 대적인 아람 왕을 살려준 아합 왕에게 선지자가 저주하다(31-43절)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 왕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람 왕을 아합 왕에게 붙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아합 왕으로 하여금 아람 왕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항복하고 돌아온 아람 왕을 살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대적인 아람 왕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거하라고 했으면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그 말씀을 거부하고 살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사탄 마귀와 싸울 때 우리들의 인정에 이끌리면 안 됩니다. 이런 아합 왕의 태도에 선지자가 등장해서 저주를 선언합니다. 42절을 보시겠습니다. “저가 왕께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제 아합 왕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므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을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에 불순종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아합 왕은 하나님께 심판받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답답하여 돌아갔다고 43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승리 다음에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똑똑해서 승리한 줄 착각합니다. 그런 착각도 문제이지만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셨다고 고백한 이후에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올바른 것은 못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될 때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될 때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꼭 그때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교회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 부흥의 배후에는 마귀의 장난도 심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교회 많은 헌금을 하고 봉사를 많이 한 사람들이 크게 시험을 받는 이유를 아십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열심을 봉사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데 차츰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때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럼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단순히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과 아합 왕이라는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떤 하나님으로 드러내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인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여전히 하나님의 그런 은혜와 자비를 거부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아합 왕의 불순종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겠다는 사단적인 발상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외면하고 자신의 힘과 자신의 의지로 살려고 하는 그 행동을 하나님은 거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공로를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런 우리들의 공로는 하나님께서 철저히 거부하실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하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으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시며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복된 복음으로 들려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진리입니다. 진리의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답답함이 사라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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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1] 엘리야의 피신과 하나님의 보호본문 / 왕상 19:1-21 열왕기상 18:1-46절 까지의 말씀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主)가 바알이냐 여호와냐 라는 두 신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역자로 삼아 바알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주가 아니라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애굽에서의 430년, 광야에서의 40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잊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살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실할 것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한 징계의 압박으로 언약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사사시대 400년이 넘는 기간 줄기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통하여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신지를 엘리야를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주님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은 19장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를 주님으로 고백으로 자들에게 대한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또한 반대로 여호와의 주님되심을 거부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1. 엘리야가 이세벨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껴 피신함(1-8절)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였습니다. 이같은 이야기가 이세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들을 보호해 주는 보호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적인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의 보호자로 자처한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의 적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세벨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이때 엘리야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 속에서 우리는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 첫째, 거짓선지자의 대모였던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는 음모는 무엇을 의미합니까?(1-2절)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끌어 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 어떠한 방해꾼이 등장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운동이 계속 진행되는 중에 사탄 마귀의 장난과 방해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전형적인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이세벨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사탄의 상징으로 등장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것은 결국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운동을 중단시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사탄의 어두움의 영들이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무너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땅에서 이루어지지 않게 하려는 음모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음모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사탄 마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들을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세벨은 절대로 엘리야를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낙심하며 죽기를 구합니다(3-4절) 엘리야는 이세벨의 음모를 피해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유다 광야 로뎀나무 아래서 그는 낙심하며 죽기를 구했습니다. 4절에 보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엘리야도 인간인지라 낙심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큰 고통 가운데 있었으면 죽여달라고 했겠습니까? 모세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사명자에게는 때로는 고독과 낙심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런 사명자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힘이 되어 주고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에게도 남모른 이런 외로움과 고독과 낙심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겠죠. 그러나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계속 그렇게 절망과 좌절과 낙심 가운데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낙심해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음식과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5-8절).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하는 사람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계속 낙심과 좌절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힘을 잃고 낙심할 때 우리 주님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위로의 손길이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해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먹을 음식을 제공해 줍니다. 힘을 얻게 해 주십니다.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에게 감당할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실패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사명 때문에 먹을 것을 주십니다. 사업의 번창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2. 여호와께서 피신해 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심(9-14절) 본문 9절에 보시면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무서워서, 두려워서 도망을 쳐 동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절망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의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실패의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와 주셨습니다. 두렵고 무서워 떨고 있는 그 자리에 우리 주님은 찾아오셔서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이 언제까지 그런 절망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 있어야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앉아 있어야 하고 신세타령만 하고 있을 것이냐고 반문하십니다. 엘리야도 그렇고 우리들도 계속해서 그런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 오셨습니다. 백부장에게 찾아오시고 삭개오에게 찾아오셨던 우리 주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찾아 오셔서 언제까지 그렇게 울고만 있을 것이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것은 그냥 찾아오신 것은 아닙니다. 사명을 주시고 축복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을 축복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에 충실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여호와께서 대적에 대한 심판을 약속하고 위로함(15-18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찾아오셔서 축복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에게는 심판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심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람왕을 세워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약속이 임합니다(15절).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가서 아람왕 하사엘을 세울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이며 하나님의 대적인 아람왕을 세우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배반할 때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주변 나라를 강성케 하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말씀대로 아람 왕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침략해 들어오게 됩니다(왕하10:32-33).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징계하실 때 징계의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주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력들에게 강성하게 합니다. 그렇게 강성한 세력을 회초리로 사용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이스라엘에 예후 왕의 반란과 쿠데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16절). 이제 이방 대적을 통한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세워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심판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후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 말씀대로 열왕기하 9장에 보면 예후의 반란과 쿠데타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심판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후의 쿠데타로 백성이 죽게 되는 비극의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한 왕을 주신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권력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도자가 악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선지자 엘리사를 세워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약속합니다(17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인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심판을 가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에 보시면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말씀합니다. 넷째, 그러나 심판중에서도 남는자에 대한 긍휼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며 위로합니다(18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토록 패역하고 범죄한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다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를 남겨 긍휼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합니다. 4.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엘리사를 세우십니다(19-21절).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다메섹 광야로 가는 도중에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 곁을 지나가다가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엘리사에게 걸쳐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자신의 옷을 벗어서 자신에게 걸쳐 주는 것은 예삿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옷은 바로 예언자의 옷입니다. 엘리사에게 그 예언자의 옷을 걸쳐 주는 것은 자신을 부른 것으로 알았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엘리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21절 말씀에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라고 합니다. 이제 완전히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는 장면입니다. 엘리사가 부름 받는 장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16절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라고 합니다. ‘아벨므홀라’라는 동네 이름과 사밧의 아들인 엘리사라는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선지자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엘리야가 엘리사를 선지자로 불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엘리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부인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생업인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9장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무슨 교훈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적대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으로 응수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런 적대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귀한 종들을 남겨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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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20]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본문 / 왕상 18:1-46 지난 시간에 열왕기상 17:1-24절 말씀을 통하여 “사르밧 과부에게 보냄 받은 엘리야”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아합이 왕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아합왕뿐만 아니라 북왕국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무엇으로 그들을 심판했느냐면 가뭄으로 심판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게 되자 들에 곡식은 열매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심판 중에서도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에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힘입고 살아갑니다. 여기에 감사와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런 찬양과 감사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대결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신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엘리야에게 약속합니다(1-15절). 17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가뭄으로 인한 심판이 근 3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18:1). 그런 심판이 있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비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같은 약속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본문 1-15절 까지에서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아합왕에게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첫째, 엘리야가 여호와의 비 내리실 약속을 받고 아합에게 갑니다(1-2절). 본문 1절에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합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와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둘째, 아합왕과 왕궁의 대신 오바댜가 물 근원을 찾아 나섭니다(3-6). 2절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심했는가를 3-6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뭄이 얼마나 심했으면 아합왕까지 나서서 물 근원을 찾아 나섭니다. 왕에서부터 왕궁 대신에게 이르기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줄기를 찾아 나섭니다(5-6절). 본문은 아합왕의 대신 오바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3절)라고 합니다. 또한 그는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죽일 때 100명을 숨겨 주었고 먹을 것과 물을 주었습니다(4절). 악한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한 하나님의 종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남겨 주신 여호와의 종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됩니다. 악한 이 시대에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쓰임 받는 종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아합왕과 같은 사람입니까? 참으로 무섭습니다. 혹 우리는 쓰임을 받고 버림을 받는 사람은 아닙니까? 아니면 끝까지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엘리야가 오바댜를 만나 아합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합니다(7-15). 아합왕과 마찬가지로 궁내 대신인 오바댜도 물 근원을 찾아 나섭니다. 그때 오바댜는 엘리야와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만나게 되자 오바댜는 한눈에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를 알아봅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으로 통하는 법입니다.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아합왕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8절). 그러자 오바댜는 아합왕에게 전하라는 말을 그대로 전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다.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오바댜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제가 당신을 떠나 왕에게 가면 하나님의 신, 즉 하나님의 영이 곧 당신을 제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제가 가서 왕에게 말하였다가 왕이 와서 당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왕은 저를 거짓말했다고 저를 죽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바댜는 엘리야의 말을 아합왕에게 전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합왕을 만나라 했습니다. 그래서 비가 내릴 것을 일러주라고 했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왕을 만나라는 것을 듣지 못했고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아합왕을 만나면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아합왕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모르면 불안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이런 불안과 근심 걱정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2.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16-40)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자신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것이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입니다. 첫째, 엘리야가 아합을 만나 갈멜산으로 바알 선지자를 소집케 합니다(16-19절). 아합왕은 엘리야를 보자마자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17절)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엘리야가 17:1절에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가뭄으로 인하여 고통을 가져오게 된 원인은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좇은 아합왕과 그 집안 때문에 이런 고통이 임했다고 선지자가 말해 줍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을 떠난 그들에게 징계로 임한 결과였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세벨의 보호 아래 있는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을 갈멜산으로 모이게 해 달라고 합니다(19절). 과연 그들에게 임한 가뭄의 원인이 엘리야에게 있는가 아합왕가에 있는가를 밝혀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엘리야가 대결을 제안합니다(20-24절). 드디어 갈멜산에 모든 백성이 모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모였습니다. 엘리야는 백성에게 여호와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바알을 섬길 것인가 결단을 촉구합니다(21). 그러나 백성들이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송아지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각각 자기가 믿고 있는 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이라 하면서 대결을 제안하고 그대로 실행에 들어갑니다. 셋째, 바알 선지자들의 제단에 응답이 없었습니다(26-29절). 먼저 거짓 선지자들이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2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그때 엘리야가 그 모습을 보고 조롱합니다. 27절입니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그들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그들의 예배 관습에 따라 칼과 창으로 피가 흐르도록 자기 몸을 찔렀습니다(28절). 자기 학대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이단들입니다. 넷째, 엘리야의 제단에 불로 응답이 되었습니다(30-39). 그러나 엘리야가 하나님을 부를 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이 두루 흐르는 단과 물로 가득한 단 주위에 불을 내리셔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과연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려서 그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는 은혜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7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다섯째,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를 죽입니다(40절).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때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죽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4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3. 약속대로 비가 내립니다(41-45절).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오게 됩니다(41-45).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41절) 비가 내린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아합은 기적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42절) 기도하면서 사환에게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환은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일곱 번까지 다시 가서 보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사환이 말하기를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 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가 올 것인데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라고 합니다(44절). 얼마 후에 비가 내렸습니다. 45절을 보겠습니다.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가득한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왕 아합왕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런 심판 속에서도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합왕의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길이 인내하심을 시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아합왕이 북쪽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하나님 여와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게 누가 진정한 주님이신지를 보여줍니다. 바알이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비를 내리시고 풍요를 주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약 5:17절에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 죄가 용서를 받습니다. 그 용서받은 은혜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이는 오로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늘 성령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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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9] 사르밧 과부에게 보냄 받은 엘리야본문 / 왕상 17:1-24 지난 시간에 우리는 왕상 16:8-34절 말씀을 통하여 북왕조의 시므리왕, 오므리 왕, 아합왕의 범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횡행했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남쪽 유다가 아닌 북쪽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북왕조의 왕들은 한결같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여 심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합왕의 범죄 행위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방 시돈 왕의 딸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나라의 왕인 아합왕이 이방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 결혼은 아합왕이 우상을 더욱 섬기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악을 행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런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이 북쪽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셔서 어떻게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말씀이 되겠습니다. 1.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가뭄을 예언하다(1절). 구약성경에서 흉년이나 가뭄은 하나님의 징계 심판으로 설명합니다. 본문 역시 가뭄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본문 17:1절을 보시겠습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가뭄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먼저 엘리야는 내가 다시 명령하기까지 앞으로 몇 년 동안, 비나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째,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아합왕은 하나님께 많은 죄악을 범했습니다. 그런 아합왕에게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합왕의 죄를 책망하고 그들의 죄를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합왕도 회개하면 됩니다. 즉 회개한다는 말은 구약식으로 표현하면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며, 그 언약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던 아합왕에게 다시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이키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아합왕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둘째, 죄를 범한 아합왕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지금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까지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그 왕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케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품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들이 돌이키지 아니할 때 가뭄이 올 것을 예고합니다. 비가 수년 동안 오지 않고 흉년으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무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예언합니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온다는 것은 삶이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고통입니다. 환난입니다. 비가 와야 정상적인 그들의 생활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으므로 들에 곡식이 소출을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 고통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징계가 임합니다. 그 징계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무슨 교훈을 받게 됩니까? 이런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각성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기회는 자주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늘 우리의 입으로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합니다. 2.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가 까마귀의 도움을 받다(2-7절). 하나님께서 아합왕과 북왕조를 심판하기 위하여 흉년을 예고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흉년 가운데서도 엘리야를 보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단강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서 그 시냇물을 마시며 먹을 것을 까마귀 입을 통하여 보내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심판의 흉년 속에서도 엘리야와 함께 하셨습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3절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절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절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절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절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죄악대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은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째, 자연 동물까지 동원해서 엘리야와 함께하십니다. 까마귀 입을 통해서라도 선지자 엘리야에는 흉년 속에서도 지켜 주십니다. 까마귀가 무엇을 알아서 엘리야를 돕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지배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분이십니다. 까마귀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그런 어려운 흉년 속에서도 선지자 엘리야를 기억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에 당장 죽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을 위해서라도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3. 사르밧 과부에게 보냄을 받은 엘리야(8-16절)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엘리야에게 임합니다. 흉년으로 그릿 시냇물 마져 마르면 시돈에 있는 사르밧에 한 과부가 있는데 그 과부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고 지시합니다. 그곳에 있는 한 과부를 미리 준비해 주셔서 그 여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엘리야가 사르밧에 갔을 때 땔감을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10절). 하나님은 순간순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셔서 위로를 받게 합니다. 좌절하지 않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물을 떠다 드립니다. 엘리야는 먹을 것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연인은 빵 한 조각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침 통에 가루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 몇 방울이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12절). 이제 너무 어려워서 이 땔감으로 나와 아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은 후에 죽겠다고 합니다(12절). 얼마나 불행한 이야기입니까? 이때 엘리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선 음식을 만들어서 먼저 나로 먹게 한 후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왕상 17:14). 그러고 보면 3년 6개월 동안 그 여인의 집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 속에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진리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한 여인만을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눅 4:25-2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5절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절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복음을 증거할 때 다 믿지 않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셨음을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의 이야기를 합니다. 엘리야는 당시 사르밧 과부를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죄악으로 가득한 북쪽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시돈이라는 이방여인인 사르밧 과부를 부르시기 위하여 엘리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 시돈은 이방인으로서 구원에서 제외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그 시돈에 있는 사르밧 과부를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입니다. 장차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둘째, 선지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희생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죄악 때문에 고통당하는 그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선지자 엘리야가 덩달아 몸소 친히 고통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희생당하는 선지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희생을 당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희생 없이는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함께 하실 때 그의 헌신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사르밧 과부와 함께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이 사건 배후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 여인의 삶의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그 여인은 분명히 엘리야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12절)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것은 이미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이 과부도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마음과 그의 태도는 어쩌면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고백적인 삶의 태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불교 신자들이 목사님을 귀하게 여기며 음식을 대접하겠습니까? 믿는 신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목사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결국 누가 목사님을 돕겠습니까? 결국 같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목사님을 우습게 여기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4.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표적을 보이심(17-34절). 결국 그 여인의 아들이 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여 그 여인의 아들을 살려 줍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어우러져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의 기근으로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엘리야 선지자와 사르밧 과부의 가족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입게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문 20절에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시 그 죽은 자를 살려주셨습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에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우리는 과거 북쪽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심판과 그 심판 중에서도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과거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지나쳐 버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사람들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하여 심판과 저주를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는 한 가족에게 찾아와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에게 찾아와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피에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의 성육신은 전능하시고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범죄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끌어들이는 그런 일이 없도록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며 충성하셔서 축복받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재열 목사(새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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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 강론 18] 북왕조의 시므리, 오므리, 아합의 범죄와 심판본문 / 왕상 16:8-34 지난 시간에는 15:25-6:7절 말씀을 통해서 북쪽 이스라엘 왕조의 나답과 바아사 왕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들과 언약 밖의 백성들을 대하시는 방식이 역사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론 혈통적으로 언약 밖의 백성일지라도 기회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버리고 계속 하나님께 범죄할 때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을 멸망케 하시고 진멸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의해서 해결하고 용서받는 자들에게는 예외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죄 문제를 해결한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에 고마움을 표시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알고 깨닫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심판 속에서도 은혜를 베푸십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진행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시기도 합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 같은 북쪽 이스라엘 왕조의 왕들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시므리왕, 오므리 왕, 아합왕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시므리가 엘라를 모반하고 왕이 됨 (8-14절) 우리는 지금 열왕기상을 살펴보면서 북쪽 이스라엘 왕조에 관해서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북왕조의 첫 왕은 여로보암이었고 2대는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됩니다. 3대 왕은 나답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 바아사입니다. 그 바아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고 4대 왕으로 엘라가 왕이 됩니다. 이 엘라는 2년을 통치한 다음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시므리에 의해서 암살당합니다. 시므리가 5대 북쪽 이스라엘 왕조의 왕이 됩니다. 5대 시므리에 이르기까지 여로보암 가문, 바아사의 가문, 시므리 가문이 왕족이 되어 서로 모반과 쿠데타로 왕권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 왕조는 이런 모반과 쿠데타에 의해서 왕위가 전승되지 않습니다. 한 왕족인 유다 자손일 뿐입니다. 그 이유는 남쪽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언약 밖의 백성들로 상징된 북왕조와는 다릅니다. 오늘은 본문 16장 말씀을 통해서 먼저 시므리 왕에 관해서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엘라의 군대장관 시므리가 엘라를 암살하고 왕이 되다(8-10절). 시므리왕은 바아사의 아들 엘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된 자입니다. 엘라는 바아사 가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망하게 됩니다. 더 이상 왕족으로서의 대가 끊어집니다. 북왕조 엘라가 왕으로 있을 때 남쪽 유다 왕조의 왕은 아사였습니다(8절). 엘라는 겨우 2년을 통치하는데 끝났습니다. 엘라 왕이 먹고 취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병거 절반을 통솔하고 있었던 시므리 장관이 후방에 남아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엘라 왕을 죽이고 왕이 됩니다(10절). 시므리가 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오므리 군대 장관이 듣습니다. 깁브돈에 있는 군대들은 오므리를 왕으로 세우고 당시 북왕조의 수도였던 ‘디르사’로 올라가 성을 포위했습니다. 시므리왕은 성이 오므리에 의해서 함락됨을 보고 왕궁에 불을 놓아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시므리는 겨우 7일 동안의 왕으로 이스라엘의 최단명 왕이었습니다(15-18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하나님과 함께했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품을 떠났을 때 어떠한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라가 분열되기 전, 하나의 왕국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고 살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나 북쪽 이스라엘 왕조로 분열되면서 그들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활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비극의 역사.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날 때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비극은 계속될 것입니다. 둘째, 반란자 시므리를 통해 바아사의 집을 멸절시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다(11-13절) 다같이 11-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1절 “시므리가 왕이 되어 왕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안사람들을 죽이되 남자는 그의 친족이든지 그의 친구든지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12절 “바아사의 온 집을 멸하였는데 선지자 예후를 통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하신 여호와의 말씀 같이 되었으니.” 13절 “이는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의 아들 엘라의 죄 때문이라 그들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예후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기를 바아사 집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대로 그 집이 심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심판의 동기는 ① 바아사와 그의 아들 엘라의 죄 때문입니다. ②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범죄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시는 동시에 그 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을 열심히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억제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주시지 않고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할 것을 말씀합니다. 회개한 우리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무너지면 우리들의 범사나 생활 역시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2. 오므리의 반란 진압과 통치 (15-28절) 첫째, 오므리의 반란으로 시므리가 자살하다(15-20절). 엘라의 군대 장관 시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엘라 왕을 암살하였다는 말을 같은 군대 장관이었던 오므리가 듣습니다. 오므리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오므리 군대가 시므리를 포위합니다. 그때 시므리는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자살하고 맙니다. 결국 시므리는 7일 동안으로 왕에서 물러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받은 이유를 19절에서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 그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시므리의 범죄 행위를 보면, 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했습니다. ② 죄의 덩어리로 상징된 여로보암의 길로 갔습니다. ③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케 했으며 그 죄 가운데서 행하게 했습니다. 둘째, ‘오므리’와 ‘디브니’ 의 두 개의 파로 갈라집니다(21-23절). 언제나 범죄의 집단은 옳은 정도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언제나 분열과 분쟁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한 어두움의 그늘로 가득한 사람들의 말로입니다. 결국 디브니가 죽자 오므리가 왕이 됩니다(22-23절). 셋째, 북왕조의 수도 사마리아가 건축되다(24-27절). 결국 오므리 왕 때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건축됩니다(24절). 사마리아 성을 건축한 오므리의 범죄상이 25-26절에 기록됩니다. 25절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26절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오므리 범죄는, 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합니다. ② 그 전의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했습니다. ③ 여로보암의 범죄의 길로 갔습니다. ④ 이스라엘 백성들을 범죄케 했습니다. 3. 아합 (아내:이세벨) 왕의 범죄 (29-34절) 오므리가 죽게 됩니다. 그 오므리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오릅니다(28절). 그 유명한 아합왕과 그 아내 이세벨이 하나님께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첫째, 여호와 보시기에 더욱 악을 행하여 여호와의 노를 격발합니다(30-33). 아합의 범죄의 목록을 한 번 봅시다. ①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했습니다(30절). ② 이방의 시돈의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31절). ③ 그의 아내를 맞이하면서 이방 신의 바알을 섬기고 숭배했습니다(31절). ④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우고 제단을 만들었습니다(32절). ⑤ 바알 뿐만 아니라 아세라 목상의 우상도 만들었습니다. 이런 아합 왕의 범죄 행위는 그 이전 왕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범죄들이었습니다.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33절)고 합니다. 둘째, 여리고를 건축한 히엘은 여호수아 6:26절의 예언된 저주가 임하다(34절). 여호수아 6:26절에 이런 예언이 기록됩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이 예언의 말씀 따라 아합 왕 때 히엘이라는 사람이 이 성을 건축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이같은 저주의 예언은 무려 500년 전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500년이 지난 후에도 하나님의 예언은 틀림없이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앞으로 계속 열왕기상 22장까지 아합 왕의 범죄 행위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을 무서워한 백성 가운데서 태어났다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다가 그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을 때 혹 내가 아합 왕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들을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 묵상과 기도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언약의 백성,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계열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시므리와 오므리와 아합왕으로 이어졌던 북쪽 이스라엘은 언제나 반란과 쿠데타로 일관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권을 위해서는 언제나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개인이나 나라나 사회가 잘된 경우가 있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세계를 지배했던 바벨론, 앗수르, 헬라, 로마의 세력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십시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는 그런 귀한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이미 경고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 말씀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각성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